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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최근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이성과 감성의 이항대립을 비판하고 감성의 문제에 관심이 증가하면서, 공감, 연민, 사랑, 소통 등의 언술이 공동체와 교육의 대안적 사유로 회자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언술들이 감상주의적으로 읽히면서 립서비스 차원이나 종교적 규범으로 읽히는 경향을 경계하고, 공감이 매우 행하기 힘든 사회적 실천이라는 자각, 이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를 살펴본다. 공감이 어려운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개인의 품성, 무관심, 고통을 낳는 사회적 요인에 대한 미인지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이 글은 우마 나라얀이 지적하고 있는, 피억압자가 겪는 억압과 부당함의 ‘감정적 반응’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감이 실행하기 어려운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회의하지는 않으며 정반대로 매우 긴급한 사회적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이를 위한 한 방법으로 감정이입, 역지사지, 동일시를 넘어서는(혹은 포함하는) 탈동일시를 제안한다. 탈동일시는 1990년대 중반 이래 호세 무노즈, 릴라 페르난데스, 로즈메리 헨네시, 호세 메디다 등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논자에 따라 맥락, 수위, 주장이 다르지만 정체성이 핵심적 자원이며 주변부 집단의 저항 전략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탈동일시는 기존의 이데올로기 및 주류 정체성에 동일시하거나 그에 대한 반동일시의 형태 양자를 비판하고, 그들의 이분법적 대립항 자체를 벗어난 존재론적 혹은 저항적 양식을 뜻한다. 정체성 정치와 변혁의 문제를 고민한 헨네스와 페르난데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탈동일시 주체는 소수자 정체성을 저항의 준거점으로 삼지 않는다. 탈동일시 주체는 특정 정체성 자체가 아닌 역사적으로 구성된 경험에 대한 분석 능력을 강조하고, 성별, 인종, 계급 등과 같은 사회적?외피적 정체성과 자아의 분리를 주장한다. 더 나아가 보편적 자아로서의 영적 자아로의 변화도 염두하고 있다. 이 영적 자아는 신비주의적 가치라기보다 에고 중심의 자아에 대한 집착을 탈피한 일상적, 윤리적 실천 을 뜻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실천하기도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이와 같은 변혁 이 실천되었을 때만이 장기적?제도적 사회변화의 가능성 또한 도모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