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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Jun’s Self-consciousness and the Direction of His Thinking
본 연구는 조준의 자아정체성과 사유가 그의 정치적 활동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조준은 원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 세족 출신이기에 현실적 힘을 중시하였다. 그가 명에 대한 군사적 대결에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자기 능력으로 성공하려는 의지와 책임감이 컸다.BR 조준은 신돈의 축출 이후에 출사하였고, 고려왕조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그는 우왕대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경세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BR 조준의 문제의식은 군주의 통치 능력과 권세가의 횡포에 있었으며, 4년간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함께 이성계와 연계하였다. 당시 그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준은 정계의 중심이 되어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정치적 반대에도 전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바탕에는 정체성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BR 조준은 개혁 추진에서 군주의 결단과 의지를 중시하여, 우왕과 창왕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공양왕을 세우는데 명분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군주 능력을 중시하면서 왕조 개창에 참여하였다.BR 조선왕조 이후 조준은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그에게 군사권을 주었지만 정치적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준의 위상은 왕자의 난으로 크게 추락하였다. 그는 은거와 출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준은 제갈량을 역사적 모델로 보았다. 조준의 삶은 자부심과 경세가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관료적 성취감 속에 있다. 그의 성격적 특성과 정체성은 조선왕조의 제도와 행정의 틀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