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55
Jung Soo Han
본 연구에서는 먼저 성종대를 중심으로 의제 정비 방향과 대송 관계를 파악하려 했다. 이어 성종이 어떻게 국가 의제 정비를 전개했는가와 그 특징 등을 살펴보면서 그 정치 문화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BR 성종은 태조 이래 대왕 의식을 주목했다. 그리고 중국 고제 및 당․송 예제, 태조 유풍과 광종의 칭제건원 개혁, 신라 관련 토풍을 참작했다. 그 결과 다방면에 걸친 의례 및 제도 정비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를 볼 때 성종을 ‘교화 군주(敎化君主)’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성종은 새로운 길이라 할 ‘제왕’의 나라로서의 예제 정비를 했다. 이러한 고려를 송은 유교 예제 면에서 송과 같은 서계동문(書契同文)을 이룬 나라라 보았다.BR 이상과 같이 성종은 양국 관계를 적극 활용했다. 사대라는 명분을 행하면서 예제 정비라는 실리를 이뤘다. 그 정치 문화적 의미는 성종이 제왕에 입각한 의제 정비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화풍 추구라는 면에 있어 고려왕조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title":"A Study on the Improvement of King Seongjong\"s Ritual and System and its Political and Cultural Implications in Goryeo Dynasty","authors":"Jung Soo Han","doi":"10.31335/hpts.2023.08.81.55","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55","url":null,"abstract":"본 연구에서는 먼저 성종대를 중심으로 의제 정비 방향과 대송 관계를 파악하려 했다. 이어 성종이 어떻게 국가 의제 정비를 전개했는가와 그 특징 등을 살펴보면서 그 정치 문화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BR 성종은 태조 이래 대왕 의식을 주목했다. 그리고 중국 고제 및 당․송 예제, 태조 유풍과 광종의 칭제건원 개혁, 신라 관련 토풍을 참작했다. 그 결과 다방면에 걸친 의례 및 제도 정비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를 볼 때 성종을 ‘교화 군주(敎化君主)’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성종은 새로운 길이라 할 ‘제왕’의 나라로서의 예제 정비를 했다. 이러한 고려를 송은 유교 예제 면에서 송과 같은 서계동문(書契同文)을 이룬 나라라 보았다.BR 이상과 같이 성종은 양국 관계를 적극 활용했다. 사대라는 명분을 행하면서 예제 정비라는 실리를 이뤘다. 그 정치 문화적 의미는 성종이 제왕에 입각한 의제 정비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화풍 추구라는 면에 있어 고려왕조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17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6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195
Sung Mo Yim
이 논문은 1930년대 만주국군의 육성 및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는 일본 육군의 ‘중국통’ 사사키 도이치의 군사활동과 타자인식을 조명한다. 그의 국민혁명기 활동에 주목하여 친중에서 반중, 온건론에서 강경론으로의 전향이라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기존 연구들과 달리, 여기서는 시베리아 침략전쟁 이래 사사키의 완충국 구상과 만몽 권익 옹호의 군사활동에서 드러나는 장기지속적 연속성에 주목한다. 사사키의 시베리아 및 중국 경험이 만주에서의 만주국군 육성과 상대적 자립화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일본 육군의 만주 인식에 나타나는 특징의 한 단면을 파악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title":"Recognition of Manchuria by ‘China Experts’ in the Japanese Army : Focusing on Sasaki Touichi’s Military Activities and Perception of Others","authors":"Sung Mo Yim","doi":"10.31335/hpts.2023.08.81.195","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195","url":null,"abstract":"이 논문은 1930년대 만주국군의 육성 및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는 일본 육군의 ‘중국통’ 사사키 도이치의 군사활동과 타자인식을 조명한다. 그의 국민혁명기 활동에 주목하여 친중에서 반중, 온건론에서 강경론으로의 전향이라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기존 연구들과 달리, 여기서는 시베리아 침략전쟁 이래 사사키의 완충국 구상과 만몽 권익 옹호의 군사활동에서 드러나는 장기지속적 연속성에 주목한다. 사사키의 시베리아 및 중국 경험이 만주에서의 만주국군 육성과 상대적 자립화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일본 육군의 만주 인식에 나타나는 특징의 한 단면을 파악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3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6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121
Soon Nam Kim
본 논문은 조선 세종대 남·북방 외적의 정벌 과정에서 활약하여 ‘행운의 장수’라 불린 이순몽을 통해 세종의 인사 실제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이순몽은 공신 적장으로 무과에 급제해 1419년(세종 1) 6월 대마도 왜인 정벌과 1433년(세종 15) 3월 파저강 야인 토벌에 참전해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재직하는 내내 황음·수뢰·폭력 등 혐의로 언론의 탄핵에 직면해 파면되고 복직하기를 되풀이했다. 세종은 무엇보다 그의 실전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희소성 있는 그의 참전 경험이 조선의 국방 대책에 구체성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또 관료로서 결격 사유가 많지만, 세종이 끝내 그를 다시 기용했던 인사 원칙이었다. 이를 관철함으로써 세종은 국방 대책의 유용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title":"Lee Soon-Mong(李順蒙) case : King Sejong’s personnel affairs in the Joseon Dynasty","authors":"Soon Nam Kim","doi":"10.31335/hpts.2023.08.81.121","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121","url":null,"abstract":"본 논문은 조선 세종대 남·북방 외적의 정벌 과정에서 활약하여 ‘행운의 장수’라 불린 이순몽을 통해 세종의 인사 실제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이순몽은 공신 적장으로 무과에 급제해 1419년(세종 1) 6월 대마도 왜인 정벌과 1433년(세종 15) 3월 파저강 야인 토벌에 참전해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재직하는 내내 황음·수뢰·폭력 등 혐의로 언론의 탄핵에 직면해 파면되고 복직하기를 되풀이했다. 세종은 무엇보다 그의 실전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희소성 있는 그의 참전 경험이 조선의 국방 대책에 구체성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또 관료로서 결격 사유가 많지만, 세종이 끝내 그를 다시 기용했던 인사 원칙이었다. 이를 관철함으로써 세종은 국방 대책의 유용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4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5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157
Yun Ho Shin
임진왜란 시기 경상좌수군의 수군진이 소재하였던 경상좌도는 일본과 가까운 연고로 가장 먼저 일본군에 침략당하였다. 경상좌수군의 편제는 경상좌수영 및 수군진, 읍수군 등 총 11포 2관의 규모로 조직되어 있었다. 경상좌수군의 지휘체계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관하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방어사·도원수 및 도체찰사에 보고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동래지역이 일본군의 기지가 됨으로써 부산 앞바다를 경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상좌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593년부터 일부 잔존 수군들이 집결하면서 경상좌수군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유의·이수일·이운룡 등 총 4명으로 파악되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수일과 이운룡이었다.BR 임진왜란 초부터 동래지역이 함락되면서 경상좌수군의 주요 포구가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이수일이 수사에 제수되면서 비교적 북쪽 해안에 있었던 칠포·축산포 등 일부 수군들을 포이포로 집결시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임시 수영을 장기현 포이포로 정한 이후 감포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포이포로 주둔처를 옮겼으며, 다시 염포나 방어진에 주둔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한 것이며, 육상군과 협공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경주지역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경상좌수군은 경주 감포로 이동 배치하여 박의장·고언백·홍계남·권응수 등 육상군 및 명군들과 협력하여 경주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BR 1593년 경상좌수군이 일본군선을 사로잡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자 조정에서 경상좌수군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추진하여, 주사독전선전관 도원량을 파견하여 전선 9척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수군의 군세가 확장되면서 연일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왜적들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BR 이수일의 후임으로 이운룡이 1596년 2월,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은 방어선을 남쪽으로 내려 경상좌수영을 울산 염포에 두었다. 이때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명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팔공산회맹 등 관·의병의 결속력을 강화시켰으며, 산성수축을 진행하였다. 경상좌수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개운포 이북의 격군 및 수졸들을 경상좌수영에 보충하고, 연해 고을에서 전선을 제작하도록 조치하였다.BR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며, 울산 서생포를 다시 점거하자 경상좌수군은 염포에서 포이포로 옮겼다. 이후 명나라의 사로병진 작전에 따라 동로군은 1597년 12월, 울산왜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경상좌수군은 명군과 협력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울산 동쪽의 방어진(대왕암)에 주둔하였다. 한편, 경상좌수군에 편제된 울산군수 김태허 역시 명군과 연합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였는데, 다만 경상좌수사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육상에서 줄곧 활동하며 도원수 및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1598년 9월, 2차 울산왜성 전투 당시 경상좌수군은 감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상군과 합세하여 퇴각하는 일본을 추격하여 왜적을 포획하기도 하였다.BR 전란 초기에 붕괴되었던 경상좌수군은 이수일이 경상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장기현 포이포에 수영을 설치한 이후,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운룡은 염포에 수영을 두었다가 포이포, 방어진으로 이동하는 등 전황에 따라 적절히 수영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
{"title":"Activities and Operations of the Gyeongsang-jwa Naval Force during the Imjin War","authors":"Yun Ho Shin","doi":"10.31335/hpts.2023.08.81.157","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157","url":null,"abstract":"임진왜란 시기 경상좌수군의 수군진이 소재하였던 경상좌도는 일본과 가까운 연고로 가장 먼저 일본군에 침략당하였다. 경상좌수군의 편제는 경상좌수영 및 수군진, 읍수군 등 총 11포 2관의 규모로 조직되어 있었다. 경상좌수군의 지휘체계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관하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방어사·도원수 및 도체찰사에 보고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동래지역이 일본군의 기지가 됨으로써 부산 앞바다를 경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상좌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593년부터 일부 잔존 수군들이 집결하면서 경상좌수군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유의·이수일·이운룡 등 총 4명으로 파악되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수일과 이운룡이었다.BR 임진왜란 초부터 동래지역이 함락되면서 경상좌수군의 주요 포구가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이수일이 수사에 제수되면서 비교적 북쪽 해안에 있었던 칠포·축산포 등 일부 수군들을 포이포로 집결시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임시 수영을 장기현 포이포로 정한 이후 감포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포이포로 주둔처를 옮겼으며, 다시 염포나 방어진에 주둔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한 것이며, 육상군과 협공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경주지역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경상좌수군은 경주 감포로 이동 배치하여 박의장·고언백·홍계남·권응수 등 육상군 및 명군들과 협력하여 경주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BR 1593년 경상좌수군이 일본군선을 사로잡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자 조정에서 경상좌수군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추진하여, 주사독전선전관 도원량을 파견하여 전선 9척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수군의 군세가 확장되면서 연일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왜적들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BR 이수일의 후임으로 이운룡이 1596년 2월,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은 방어선을 남쪽으로 내려 경상좌수영을 울산 염포에 두었다. 이때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명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팔공산회맹 등 관·의병의 결속력을 강화시켰으며, 산성수축을 진행하였다. 경상좌수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개운포 이북의 격군 및 수졸들을 경상좌수영에 보충하고, 연해 고을에서 전선을 제작하도록 조치하였다.BR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며, 울산 서생포를 다시 점거하자 경상좌수군은 염포에서 포이포로 옮겼다. 이후 명나라의 사로병진 작전에 따라 동로군은 1597년 12월, 울산왜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경상좌수군은 명군과 협력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울산 동쪽의 방어진(대왕암)에 주둔하였다. 한편, 경상좌수군에 편제된 울산군수 김태허 역시 명군과 연합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였는데, 다만 경상좌수사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육상에서 줄곧 활동하며 도원수 및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1598년 9월, 2차 울산왜성 전투 당시 경상좌수군은 감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상군과 합세하여 퇴각하는 일본을 추격하여 왜적을 포획하기도 하였다.BR 전란 초기에 붕괴되었던 경상좌수군은 이수일이 경상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장기현 포이포에 수영을 설치한 이후,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운룡은 염포에 수영을 두었다가 포이포, 방어진으로 이동하는 등 전황에 따라 적절히 수영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1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7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5
Kyeong Jin Yoon
이 연구는 『삼국사기』김유신열전의 저본이 된 『김유신행록』의 서사 구성방식과 의미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이 책은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고 지적되었는데,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가공되었다.BR 첫째, 다른 사람의 사적을 가져와 김유신의 것으로 바꾸거나 김유신을 끼워 넣어 서사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춘추의 백제병합을 투영한 642년 대고구려 청병 사적을 김유신의 양국평정(兩國平正)과 연결한 것과 동타천(冬陁川)의 한산성 방어 사적을 김유신의 주술적 능력 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대표적이다.BR 둘째,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김유신의 위상을 과시하거나 그의 권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사적을 평가하는 것이다. 전자는 신라 국왕 및 중국 황제를 매개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문무왕의 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공업을 김유신에게 가져오는 장치이다. 후자는 후손에 대한 가훈의 수립과 부하의 공로를 평가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BR 셋째, 신이한 능력의 과시이다. 이는 출생의 신성성과 어린 시절 비법을 전수받은 사적을 바탕으로 하며, 적의 첩자를 간파하는 예지력과 천변을 불러오는 등의 주술적 능력으로 표현되었다.BR
{"title":"The Method of Narrative Composition of Kimyusin-Haengrok and it’s Meaning","authors":"Kyeong Jin Yoon","doi":"10.31335/hpts.2023.08.81.5","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5","url":null,"abstract":"이 연구는 『삼국사기』김유신열전의 저본이 된 『김유신행록』의 서사 구성방식과 의미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이 책은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고 지적되었는데,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가공되었다.BR 첫째, 다른 사람의 사적을 가져와 김유신의 것으로 바꾸거나 김유신을 끼워 넣어 서사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춘추의 백제병합을 투영한 642년 대고구려 청병 사적을 김유신의 양국평정(兩國平正)과 연결한 것과 동타천(冬陁川)의 한산성 방어 사적을 김유신의 주술적 능력 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대표적이다.BR 둘째,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김유신의 위상을 과시하거나 그의 권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사적을 평가하는 것이다. 전자는 신라 국왕 및 중국 황제를 매개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문무왕의 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공업을 김유신에게 가져오는 장치이다. 후자는 후손에 대한 가훈의 수립과 부하의 공로를 평가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BR 셋째, 신이한 능력의 과시이다. 이는 출생의 신성성과 어린 시절 비법을 전수받은 사적을 바탕으로 하며, 적의 첩자를 간파하는 예지력과 천변을 불러오는 등의 주술적 능력으로 표현되었다.BR","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5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91
In Ho Kim
본 연구는 조준의 자아정체성과 사유가 그의 정치적 활동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조준은 원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 세족 출신이기에 현실적 힘을 중시하였다. 그가 명에 대한 군사적 대결에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자기 능력으로 성공하려는 의지와 책임감이 컸다.BR 조준은 신돈의 축출 이후에 출사하였고, 고려왕조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그는 우왕대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경세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BR 조준의 문제의식은 군주의 통치 능력과 권세가의 횡포에 있었으며, 4년간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함께 이성계와 연계하였다. 당시 그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준은 정계의 중심이 되어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정치적 반대에도 전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바탕에는 정체성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BR 조준은 개혁 추진에서 군주의 결단과 의지를 중시하여, 우왕과 창왕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공양왕을 세우는데 명분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군주 능력을 중시하면서 왕조 개창에 참여하였다.BR 조선왕조 이후 조준은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그에게 군사권을 주었지만 정치적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준의 위상은 왕자의 난으로 크게 추락하였다. 그는 은거와 출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준은 제갈량을 역사적 모델로 보았다. 조준의 삶은 자부심과 경세가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관료적 성취감 속에 있다. 그의 성격적 특성과 정체성은 조선왕조의 제도와 행정의 틀을 만들었다.
{"title":"Jo Jun’s Self-consciousness and the Direction of His Thinking","authors":"In Ho Kim","doi":"10.31335/hpts.2023.08.81.91","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91","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조준의 자아정체성과 사유가 그의 정치적 활동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조준은 원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 세족 출신이기에 현실적 힘을 중시하였다. 그가 명에 대한 군사적 대결에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자기 능력으로 성공하려는 의지와 책임감이 컸다.BR 조준은 신돈의 축출 이후에 출사하였고, 고려왕조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그는 우왕대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경세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BR 조준의 문제의식은 군주의 통치 능력과 권세가의 횡포에 있었으며, 4년간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함께 이성계와 연계하였다. 당시 그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준은 정계의 중심이 되어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정치적 반대에도 전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바탕에는 정체성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BR 조준은 개혁 추진에서 군주의 결단과 의지를 중시하여, 우왕과 창왕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공양왕을 세우는데 명분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군주 능력을 중시하면서 왕조 개창에 참여하였다.BR 조선왕조 이후 조준은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그에게 군사권을 주었지만 정치적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준의 위상은 왕자의 난으로 크게 추락하였다. 그는 은거와 출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준은 제갈량을 역사적 모델로 보았다. 조준의 삶은 자부심과 경세가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관료적 성취감 속에 있다. 그의 성격적 특성과 정체성은 조선왕조의 제도와 행정의 틀을 만들었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7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6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31335/hpts.2023.08.81.231
Da Eun Lim
본 논문은 6․25전쟁기 북한 농촌에서 전쟁이 인민들에게 해석되고 전달되는 방식과, 농민들을 생산전선으로 동원하기 위해 북한 지도부가 구축한 논리를 『농민신문』 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전쟁기 북한은 전쟁 피해 복구와 식량 생산, 전선 원호를 위해 후방 농민들을 지속적으로 동원해야 했고, 핵심적인 선전선동 매체로서 신문의 역할을 강화하였다.BR 신문이 전쟁 경험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으며, 이를 통해 농민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공통적인 전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말 유엔군 점령을 겪은 직후 신문은 농촌 각지에서 미군이 입힌 피해를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공통된 감정으로 도출해냈다. 그러나 1951년 중반 이후 전선이 고착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신문 보도는 전쟁 피해의 참상보다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성농민들의 의지와 투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농촌에서 전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선과 후방의 연결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으며, 전쟁의 의미를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맥락에서 해설함으로써 생산전선의 농민들을 설득하고자 했다.BR 전시 농업생산에 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신문은 모범기사와 비판기사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전쟁기에는 특히 인민군대의 가족 및 애국열사 유가족이 농촌사회의 새로운 주체로 주목받았고, 특히 적극적으로 생산전선에 나선 후방 여성들이 모범사례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때 여성들은 여전히 가족의 위계관계 속에서 호명되었고, 가정의 운영과 생산활동을 병행하는 이중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 생산적 주체가 되려는 자조(自助)의 태도를 갖출 때 모범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비판기사의 주된 소재는 경종법에서의 보수성과 농업경영에서의 이기적인 태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은 개인경리(個人經理)의 원칙이 유지되면서도 전시생산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강화되는 국면에서 발생한 국가와 농민 간의 긴장을 보여준다.
{"title":"A Study on North Korea’s War Experience and Mobilization of Peasants during the Korean War","authors":"Da Eun Lim","doi":"10.31335/hpts.2023.08.81.231","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8.81.231","url":null,"abstract":"본 논문은 6․25전쟁기 북한 농촌에서 전쟁이 인민들에게 해석되고 전달되는 방식과, 농민들을 생산전선으로 동원하기 위해 북한 지도부가 구축한 논리를 『농민신문』 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전쟁기 북한은 전쟁 피해 복구와 식량 생산, 전선 원호를 위해 후방 농민들을 지속적으로 동원해야 했고, 핵심적인 선전선동 매체로서 신문의 역할을 강화하였다.BR 신문이 전쟁 경험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으며, 이를 통해 농민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공통적인 전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말 유엔군 점령을 겪은 직후 신문은 농촌 각지에서 미군이 입힌 피해를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공통된 감정으로 도출해냈다. 그러나 1951년 중반 이후 전선이 고착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신문 보도는 전쟁 피해의 참상보다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성농민들의 의지와 투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농촌에서 전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선과 후방의 연결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으며, 전쟁의 의미를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맥락에서 해설함으로써 생산전선의 농민들을 설득하고자 했다.BR 전시 농업생산에 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신문은 모범기사와 비판기사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전쟁기에는 특히 인민군대의 가족 및 애국열사 유가족이 농촌사회의 새로운 주체로 주목받았고, 특히 적극적으로 생산전선에 나선 후방 여성들이 모범사례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때 여성들은 여전히 가족의 위계관계 속에서 호명되었고, 가정의 운영과 생산활동을 병행하는 이중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 생산적 주체가 되려는 자조(自助)의 태도를 갖출 때 모범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비판기사의 주된 소재는 경종법에서의 보수성과 농업경영에서의 이기적인 태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은 개인경리(個人經理)의 원칙이 유지되면서도 전시생산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강화되는 국면에서 발생한 국가와 농민 간의 긴장을 보여준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5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0265","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4-30DOI: 10.31335/hpts.2023.04.80.75
Geun Ho Lee
이 글은 『연성지』와 함께 각종 지리지를 활용해 연기 지역의 인구와 부세 현황을 살핀 것이다. 지리지나 각종 자료에서 확인되는 인구나 부세 현황은 그 자체로 실제 수치는 아니다. 국가의 인구나 부세 정책을 반영하여 정리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 『연성지』 등 지리지에서 확인되는 수치를 통해서 연기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추이를 살필 수 있다. 연기 지역민들은 농업에 부지런히 힘썼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연기가 잔읍(殘邑)으로 분류되었는데, 이상에서 살핀 인구나 부세 추이는 잔읍 연기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는 중앙에서 파악한 기준이기는 하다. 또한 조선시대 연기를 포함해 잔읍으로 분류된 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보여주는 일례로써 의미가 있다.BR 한편 이 글은 『연성지』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연성지』는 현전하는 연기 지역 읍지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19세기 전반기 연기 지역의 다양한 역사상을 보여주는 사료로써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일례로 이 글에서 살펴본 인구 현상이나 부세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우리에게 과제도 던져주고 있다. 19세기 전반기 중앙 정부의 인구나 부세 정책과 관련성에서 해석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연기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인문적인 상황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향후 연기 지역이 포함된 세종시의 역사문화콘텐츠 구축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자료이다.
{"title":"A Study on the Population and Imposing Tax Status Featured in the Journal of Yeonseungji","authors":"Geun Ho Lee","doi":"10.31335/hpts.2023.04.80.75","DOIUrl":"https://doi.org/10.31335/hpts.2023.04.80.75","url":null,"abstract":"이 글은 『연성지』와 함께 각종 지리지를 활용해 연기 지역의 인구와 부세 현황을 살핀 것이다. 지리지나 각종 자료에서 확인되는 인구나 부세 현황은 그 자체로 실제 수치는 아니다. 국가의 인구나 부세 정책을 반영하여 정리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 『연성지』 등 지리지에서 확인되는 수치를 통해서 연기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추이를 살필 수 있다. 연기 지역민들은 농업에 부지런히 힘썼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연기가 잔읍(殘邑)으로 분류되었는데, 이상에서 살핀 인구나 부세 추이는 잔읍 연기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는 중앙에서 파악한 기준이기는 하다. 또한 조선시대 연기를 포함해 잔읍으로 분류된 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보여주는 일례로써 의미가 있다.BR 한편 이 글은 『연성지』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연성지』는 현전하는 연기 지역 읍지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19세기 전반기 연기 지역의 다양한 역사상을 보여주는 사료로써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일례로 이 글에서 살펴본 인구 현상이나 부세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우리에게 과제도 던져주고 있다. 19세기 전반기 중앙 정부의 인구나 부세 정책과 관련성에서 해석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연기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인문적인 상황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향후 연기 지역이 포함된 세종시의 역사문화콘텐츠 구축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자료이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4-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71350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