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临津战争时期庆尚省海军的活动和作战","authors":"Yun Ho Shin","doi":"10.31335/hpts.2023.08.81.157","DOIUrl":null,"url":null,"abstract":"임진왜란 시기 경상좌수군의 수군진이 소재하였던 경상좌도는 일본과 가까운 연고로 가장 먼저 일본군에 침략당하였다. 경상좌수군의 편제는 경상좌수영 및 수군진, 읍수군 등 총 11포 2관의 규모로 조직되어 있었다. 경상좌수군의 지휘체계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관하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방어사·도원수 및 도체찰사에 보고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동래지역이 일본군의 기지가 됨으로써 부산 앞바다를 경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상좌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593년부터 일부 잔존 수군들이 집결하면서 경상좌수군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유의·이수일·이운룡 등 총 4명으로 파악되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수일과 이운룡이었다.BR 임진왜란 초부터 동래지역이 함락되면서 경상좌수군의 주요 포구가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이수일이 수사에 제수되면서 비교적 북쪽 해안에 있었던 칠포·축산포 등 일부 수군들을 포이포로 집결시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임시 수영을 장기현 포이포로 정한 이후 감포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포이포로 주둔처를 옮겼으며, 다시 염포나 방어진에 주둔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한 것이며, 육상군과 협공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경주지역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경상좌수군은 경주 감포로 이동 배치하여 박의장·고언백·홍계남·권응수 등 육상군 및 명군들과 협력하여 경주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BR 1593년 경상좌수군이 일본군선을 사로잡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자 조정에서 경상좌수군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추진하여, 주사독전선전관 도원량을 파견하여 전선 9척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수군의 군세가 확장되면서 연일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왜적들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BR 이수일의 후임으로 이운룡이 1596년 2월,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은 방어선을 남쪽으로 내려 경상좌수영을 울산 염포에 두었다. 이때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명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팔공산회맹 등 관·의병의 결속력을 강화시켰으며, 산성수축을 진행하였다. 경상좌수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개운포 이북의 격군 및 수졸들을 경상좌수영에 보충하고, 연해 고을에서 전선을 제작하도록 조치하였다.BR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며, 울산 서생포를 다시 점거하자 경상좌수군은 염포에서 포이포로 옮겼다. 이후 명나라의 사로병진 작전에 따라 동로군은 1597년 12월, 울산왜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경상좌수군은 명군과 협력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울산 동쪽의 방어진(대왕암)에 주둔하였다. 한편, 경상좌수군에 편제된 울산군수 김태허 역시 명군과 연합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였는데, 다만 경상좌수사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육상에서 줄곧 활동하며 도원수 및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1598년 9월, 2차 울산왜성 전투 당시 경상좌수군은 감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상군과 합세하여 퇴각하는 일본을 추격하여 왜적을 포획하기도 하였다.BR 전란 초기에 붕괴되었던 경상좌수군은 이수일이 경상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장기현 포이포에 수영을 설치한 이후,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운룡은 염포에 수영을 두었다가 포이포, 방어진으로 이동하는 등 전황에 따라 적절히 수영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PeriodicalId":471717,"journal":{"name":"Yeogsa wa silhag","volume":"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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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한 것이며, 육상군과 협공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경주지역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경상좌수군은 경주 감포로 이동 배치하여 박의장·고언백·홍계남·권응수 등 육상군 및 명군들과 협력하여 경주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BR 1593년 경상좌수군이 일본군선을 사로잡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자 조정에서 경상좌수군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추진하여, 주사독전선전관 도원량을 파견하여 전선 9척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수군의 군세가 확장되면서 연일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왜적들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BR 이수일의 후임으로 이운룡이 1596년 2월,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은 방어선을 남쪽으로 내려 경상좌수영을 울산 염포에 두었다. 이때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명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팔공산회맹 등 관·의병의 결속력을 강화시켰으며, 산성수축을 진행하였다. 경상좌수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개운포 이북의 격군 및 수졸들을 경상좌수영에 보충하고, 연해 고을에서 전선을 제작하도록 조치하였다.BR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며, 울산 서생포를 다시 점거하자 경상좌수군은 염포에서 포이포로 옮겼다. 이후 명나라의 사로병진 작전에 따라 동로군은 1597년 12월, 울산왜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경상좌수군은 명군과 협력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울산 동쪽의 방어진(대왕암)에 주둔하였다. 한편, 경상좌수군에 편제된 울산군수 김태허 역시 명군과 연합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였는데, 다만 경상좌수사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육상에서 줄곧 활동하며 도원수 및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1598년 9월, 2차 울산왜성 전투 당시 경상좌수군은 감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상군과 합세하여 퇴각하는 일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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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ities and Operations of the Gyeongsang-jwa Naval Force during the Imjin War
임진왜란 시기 경상좌수군의 수군진이 소재하였던 경상좌도는 일본과 가까운 연고로 가장 먼저 일본군에 침략당하였다. 경상좌수군의 편제는 경상좌수영 및 수군진, 읍수군 등 총 11포 2관의 규모로 조직되어 있었다. 경상좌수군의 지휘체계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관하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방어사·도원수 및 도체찰사에 보고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동래지역이 일본군의 기지가 됨으로써 부산 앞바다를 경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상좌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593년부터 일부 잔존 수군들이 집결하면서 경상좌수군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유의·이수일·이운룡 등 총 4명으로 파악되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수일과 이운룡이었다.BR 임진왜란 초부터 동래지역이 함락되면서 경상좌수군의 주요 포구가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이수일이 수사에 제수되면서 비교적 북쪽 해안에 있었던 칠포·축산포 등 일부 수군들을 포이포로 집결시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임시 수영을 장기현 포이포로 정한 이후 감포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포이포로 주둔처를 옮겼으며, 다시 염포나 방어진에 주둔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한 것이며, 육상군과 협공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경주지역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경상좌수군은 경주 감포로 이동 배치하여 박의장·고언백·홍계남·권응수 등 육상군 및 명군들과 협력하여 경주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BR 1593년 경상좌수군이 일본군선을 사로잡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자 조정에서 경상좌수군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추진하여, 주사독전선전관 도원량을 파견하여 전선 9척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수군의 군세가 확장되면서 연일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왜적들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BR 이수일의 후임으로 이운룡이 1596년 2월,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은 방어선을 남쪽으로 내려 경상좌수영을 울산 염포에 두었다. 이때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명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팔공산회맹 등 관·의병의 결속력을 강화시켰으며, 산성수축을 진행하였다. 경상좌수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개운포 이북의 격군 및 수졸들을 경상좌수영에 보충하고, 연해 고을에서 전선을 제작하도록 조치하였다.BR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며, 울산 서생포를 다시 점거하자 경상좌수군은 염포에서 포이포로 옮겼다. 이후 명나라의 사로병진 작전에 따라 동로군은 1597년 12월, 울산왜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경상좌수군은 명군과 협력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울산 동쪽의 방어진(대왕암)에 주둔하였다. 한편, 경상좌수군에 편제된 울산군수 김태허 역시 명군과 연합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였는데, 다만 경상좌수사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육상에서 줄곧 활동하며 도원수 및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1598년 9월, 2차 울산왜성 전투 당시 경상좌수군은 감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상군과 합세하여 퇴각하는 일본을 추격하여 왜적을 포획하기도 하였다.BR 전란 초기에 붕괴되었던 경상좌수군은 이수일이 경상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장기현 포이포에 수영을 설치한 이후,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운룡은 염포에 수영을 두었다가 포이포, 방어진으로 이동하는 등 전황에 따라 적절히 수영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