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50년대 ‘전시체제’와 국영전력사업체의 등장

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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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한국의 전력사업(電力事業)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관리와 통제라는 원칙을 유지, 발전시켰다. 에너지의 생산과 배분은 시민들이나 사기업이 관여할 수 없는 국가적 사업이라는 인식과 제도가 20세기 중반 전쟁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조선전업주식회사(朝鮮電業株式會社)의 형성과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1930년대 말부터 등장한 전시체제의 자원관리를 분석하였다. 소위 혁신관료라고 불리는 일제의 전시관료집단은 기존의 시장경제원칙을 불신하고 전쟁의 준비와 승리를 위한 자원관리, 동원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자원과 산업의 개발이야 말로 미래전의 승리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었고 결국 일제는 민유국영안이라는 전력의 국영화를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전시자원관리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남한에서 존속하였다. 특히 조선전업은 지속적으로 전력국영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거대국영기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목소리는 미국 측의 민영화 요구와 함께 국영화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한국전쟁 이후 전재복구, 산업개발, 미국원조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정부는 이미 조선전업을 사실상 ‘정부대행기구’로 활용하였다. 1950년대 조선전업은 수력과 화력발전의 복구, 확대를 주도하였고 나아가 원자력발전에도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40년대와 50년대 전력국영관리 체제의 성립과 변화는 상당한 연속성을 보이며 에너지 정책과 개발과정이 갖고 있었던 폐쇄적 성격의 역사적 기원과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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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纪40至50年代的“战时体制”和国营电力公司的登场
韩国电力事业在经历第二次世界大战和韩国战争后,维持和发展了国家管理和控制的原则。能源的生产和分配是市民和私营企业不能参与的国家性事业的认识和制度与20世纪中期战争的经验有着密切的关系。在本书中,笔者通过观察朝鲜专业股份公司的形成和变化,分析了从20世纪30年代末开始登场的战时体制的资源管理。被称为“革新官僚”的日本帝国主义战时官僚集团不信任现有的市场经济原则,一致认为有必要建立为战争准备和胜利的资源管理、动员体制。他们相信资源和产业的开发是为了未来战的胜利最必要的部分,最终日本帝国主义形成了民有国营案这一战斗力的国荣华。第二次世界大战产生的战时资源管理在解放以后继续在南韩存在。特别是朝鲜专业继续提出电力国营化的必要性。对国营企业的批判性认识和声音巨大的民营化要求和美国一起,电影起了牵制作用,但韩国战争以后恢复、产业开发、利用美援的转载。从这方面,韩国政府已经把造船专业实际上用作“政府代理机构”。50年代,朝鲜专业主导了水力和火力发电的恢复和扩大,进而开始对原子能发电积累相当的关心和知识。因此,20世纪40年代和50年代电力国营管理体制的成立和变化呈现出相当大的连续性,很好地体现了能源政策和开发过程所具有的封闭性性质的历史起源和变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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