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

정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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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 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 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 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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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战争停战会谈与战后体制的成立
韩国战争以开战初期1年的攻击、防御战和后期2年的阵地战的形式展开。在1951年7月开始的停战会谈中,最重要的绊脚石是战俘的处理问题。联合国拥有17万名共产俘虏,共产拥有1万3千名联合国俘虏。在俘虏人数相差10倍以上的情况下,共产主义方面主张强制遣返,联合国方面主张自由遣返,停战会谈被推迟。电线外也使用了多种压力手段。共产主义方面谴责说,在俘虏收容所举行暴动的同时,联合国军进行了细菌战,对此,联合国方面对北韩进行了大规模轰炸。在双方即将就1953年春天停战达成协议之际,韩国政府展开了反对停战的双重攻势。一方面展开收回作战指挥权、单独北进、释放反共俘虏等极端攻势,另一方面要求签订韩美相互防卫条约和军事援助。对此,美国制定了铲除李承晚的计划,同时展开了韩美相互防卫条约协商。为了控制韩国军队,美国要求联合国军事司令官继续保留韩国军队的作战指挥权,李承晚总统通过信件接受了这一要求。在韩国战争的漩涡中,美国与日本签订了和平条约。1951年春天,切实感受到了韩国战争危机的美国签订了宽大、友好的和平条约和反共条约。随着《旧金山和平条约》和《美日安全条约》的签署,日本交换了和平与安全。韩国虽然不是条约签署国,但在该条约的影响下与日本进行了韩日会谈。停战以后,南北韩在人力、物力损失的基础上,分裂意识和敌对意识进一步深化。韩半岛持续了敌对关系尚存的休战体制。停战后,为解决政治问题举行了日内瓦政治会谈,但在没有达成协议的情况下结束了。南北韩以军事分界线为中心,持续了军事阵地和冲突。20世纪70年代以后,海上分界线和NLL成为冲突的中心。停战以后,朝、中、苏关系进行了全面重组。在战争的开战和展开过程中,苏联和斯大林的决定力占据压倒性优势,但采取了消极和防御的态度。斯大林去世后,苏联在朝鲜的影响力有所减弱。中国虽然因战争被国际社会隔离,但却保卫了中国革命,并将北韩置于自己的影响力之下。战后,苏联和中国成为北韩唯一的援助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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