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 Date : 2023-09-30DOI: 10.35135/casky.2023.23.165
Hong Il Kim
중국 선교는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한 이후 선교수도회가 관할하게 되었다. 선교수도회 소속의 프랑스 신부이자 베이징 주교 루이 가브리엘 들라플라스는 선교를 위해 다양한 책을 저술하고 간행했다. 『성교감략』은 구약성경, 신약성경,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중국 교회사를 요약하고 있 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주로 사용한 모형론은 교 회 역사 가운데 계속된 전통이었으나, 근·현대의 역사비평으로 인해 성경 해석 방법론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성교감략』은 구약의 내용을 요 약한 후에 문답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해석했는데, 모형론적 해석이 주를 이룬다. 『성교감략』의 저술 동기는 첫째, 중국 선교를 위해 교리와 더불어 성경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둘째, 중국 내에서 아편전쟁과 홍 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는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신앙을 지킨 신앙인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들라플라스는 예수회가 사용했던 동방 선교 정책인 ‘적응주의’를 유지하고 계승하면서 지역 문화에 복음을 침투시키고자 했다. 넷째, 들라플라스는 글을 쉽게 써서 문자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교인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성교감략』은 중국에서 성경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경 번역에 대한 교황청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바쎄는 『바쎄역본』을 남겼고, 뿌와로는 『고신성경』을 남겼는데, 이들은 성경에 대한 번역이 주를 이룬다. 이에 반해 『성교감략』은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모형론을 통해 구약을 해석하고 있어서 성경 번역뿐만 아니라 명·청대 천주교의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성교감략』은 인물, 사건, 제도, 사물을 통해서 모형론적 해석을 했다.
{"title":"A Study on Typology of Sunggyo Gamryak","authors":"Hong Il Kim","doi":"10.35135/casky.2023.23.165","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165","url":null,"abstract":"중국 선교는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한 이후 선교수도회가 관할하게 되었다. 선교수도회 소속의 프랑스 신부이자 베이징 주교 루이 가브리엘 들라플라스는 선교를 위해 다양한 책을 저술하고 간행했다. 『성교감략』은 구약성경, 신약성경,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중국 교회사를 요약하고 있 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주로 사용한 모형론은 교 회 역사 가운데 계속된 전통이었으나, 근·현대의 역사비평으로 인해 성경 해석 방법론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성교감략』은 구약의 내용을 요 약한 후에 문답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해석했는데, 모형론적 해석이 주를 이룬다. 『성교감략』의 저술 동기는 첫째, 중국 선교를 위해 교리와 더불어 성경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둘째, 중국 내에서 아편전쟁과 홍 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는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신앙을 지킨 신앙인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들라플라스는 예수회가 사용했던 동방 선교 정책인 ‘적응주의’를 유지하고 계승하면서 지역 문화에 복음을 침투시키고자 했다. 넷째, 들라플라스는 글을 쉽게 써서 문자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교인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성교감략』은 중국에서 성경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경 번역에 대한 교황청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바쎄는 『바쎄역본』을 남겼고, 뿌와로는 『고신성경』을 남겼는데, 이들은 성경에 대한 번역이 주를 이룬다. 이에 반해 『성교감략』은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모형론을 통해 구약을 해석하고 있어서 성경 번역뿐만 아니라 명·청대 천주교의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성교감략』은 인물, 사건, 제도, 사물을 통해서 모형론적 해석을 했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2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35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9-30DOI: 10.35135/casky.2023.23.37
Seok-won Lee
이 글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알려진 이의창 관련 자료를 검토함으로 써 그의 이름과 가계, 세례명, 교회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이의창 관련 자료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황해 감영과 포도청 문초 기 록, 1839년 문초 기록, 1884년 시복 재판 증언 기록, 광주이씨 족보와 남 인 당파 족보[南譜] 등으로 분류된다. 포도청 문초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이의창(李宜昌)[이기양의 손자, 이방억의 아들]이 1839년에 체포되지 않았다가 1846년 김대건 신 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의창의 이름과 가계를 광주이씨 족보나 남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에 제작된 『광주이씨족보』에는 이의창이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금압 시기에 족보 제작자들이 가문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내용 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19세기 말에 제작된 남보 중에는 이의창(李宜敞)으로 나온다. 남인 명가의 계보를 종합·정리하려 했던 남보 편집자들은 ‘사학’인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표기하여 공동으로 천주교에 대응·배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의창의 형제와 후손들에 대해서는 남보 자료마다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랑(베라노) 또는 베난시오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베라노란 세례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베난시오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20세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김대건 신부 서한의 인용·번역문에 혼선과 오류가 있어서 복사의 세례명이 ‘베난시오’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성인전’에는 베라노 성인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 성인만 확인된다. 교회측 기록에는 ‘베라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의 세레명을 가진 신자는 여러 명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난시오’가 이의창의 세례명일 것으로 보인다. 이의창은 1845년 1월에 김대건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의주-변문까지 갔던 안내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고, 소공동[석정동]에 자리잡은 김대건 신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김 신부를 수행·보좌했다. 1846년 5~6월에 이의창은 김 신부를 수행하여 황해 탐사에 동참했는데 김 신부의 지시로 한문 서한을 작성했으며 중국 배로 건너가 전달하는데도 참여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후 행적은 찾을 수 없다.
{"title":"A Study on materials related to Lee Uichang Venantius","authors":"Seok-won Lee","doi":"10.35135/casky.2023.23.37","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37","url":null,"abstract":"이 글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알려진 이의창 관련 자료를 검토함으로 써 그의 이름과 가계, 세례명, 교회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이의창 관련 자료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황해 감영과 포도청 문초 기 록, 1839년 문초 기록, 1884년 시복 재판 증언 기록, 광주이씨 족보와 남 인 당파 족보[南譜] 등으로 분류된다. 포도청 문초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이의창(李宜昌)[이기양의 손자, 이방억의 아들]이 1839년에 체포되지 않았다가 1846년 김대건 신 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의창의 이름과 가계를 광주이씨 족보나 남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에 제작된 『광주이씨족보』에는 이의창이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금압 시기에 족보 제작자들이 가문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내용 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19세기 말에 제작된 남보 중에는 이의창(李宜敞)으로 나온다. 남인 명가의 계보를 종합·정리하려 했던 남보 편집자들은 ‘사학’인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표기하여 공동으로 천주교에 대응·배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의창의 형제와 후손들에 대해서는 남보 자료마다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랑(베라노) 또는 베난시오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베라노란 세례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베난시오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20세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김대건 신부 서한의 인용·번역문에 혼선과 오류가 있어서 복사의 세례명이 ‘베난시오’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성인전’에는 베라노 성인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 성인만 확인된다. 교회측 기록에는 ‘베라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의 세레명을 가진 신자는 여러 명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난시오’가 이의창의 세례명일 것으로 보인다. 이의창은 1845년 1월에 김대건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의주-변문까지 갔던 안내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고, 소공동[석정동]에 자리잡은 김대건 신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김 신부를 수행·보좌했다. 1846년 5~6월에 이의창은 김 신부를 수행하여 황해 탐사에 동참했는데 김 신부의 지시로 한문 서한을 작성했으며 중국 배로 건너가 전달하는데도 참여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후 행적은 찾을 수 없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216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34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9-30DOI: 10.35135/casky.2023.23.5
Sang-Keun Bang
최양업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의 두 번째 방인(邦人) 사제로, 2016년 4월 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된 인물이다. 최 신부는 시복 대상자가 될 정도 로 한국교회에서의 위상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러한 위상에 걸맞게 그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어, 다양한 주제의 연구 성과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의 가계, 특히 최한일(최양업의 증조) 이전의 가계를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다. 물론 최한일 이전 세대는 천주교와 무관하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족 보 기록은 기존에 불명확했던 사항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족보를 활용하여 최양업 가문과 관련된 몇 가지 문 제들, 즉 “최양업 집안이 서울에 정착한 시기, 청양으로 이주한 이유, 김화 (金化, 즉 금성) 지역과의 관계, 이 가문에서 처음으로 신자가 된 최한일의 입교 과정과 양자설(養子說), 최양업 가문의 신분” 등에 대해 새롭게 정리해 보았다. 이 중에서 특히 최양업 가문의 신분이 서족(庶族)임을 밝힌 것은 이 글의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다.
{"title":"Some problems of the Father Choi Yang-eop's family reviewed through genealogy","authors":"Sang-Keun Bang","doi":"10.35135/casky.2023.23.5","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5","url":null,"abstract":"최양업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의 두 번째 방인(邦人) 사제로, 2016년 4월 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된 인물이다. 최 신부는 시복 대상자가 될 정도 로 한국교회에서의 위상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러한 위상에 걸맞게 그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어, 다양한 주제의 연구 성과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의 가계, 특히 최한일(최양업의 증조) 이전의 가계를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다. 물론 최한일 이전 세대는 천주교와 무관하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족 보 기록은 기존에 불명확했던 사항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족보를 활용하여 최양업 가문과 관련된 몇 가지 문 제들, 즉 “최양업 집안이 서울에 정착한 시기, 청양으로 이주한 이유, 김화 (金化, 즉 금성) 지역과의 관계, 이 가문에서 처음으로 신자가 된 최한일의 입교 과정과 양자설(養子說), 최양업 가문의 신분” 등에 대해 새롭게 정리해 보았다. 이 중에서 특히 최양업 가문의 신분이 서족(庶族)임을 밝힌 것은 이 글의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1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54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9-30DOI: 10.35135/casky.2023.23.133
In Seong Yang
『셩교요리문답』은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의 교리문답서(敎理問答書)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1860년대에 목판본이 간행된 후에 1934년 『천주 교 요리문답』이 나올 때까지 70여 년간 한국 천주교회 공식 교리서로 사 용되었다. 이처럼 『셩교요리문답』이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 지만 여전히 규명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첫째, 『셩교요리문답』과 연관된 교리서가 언제 조선에 유입되었는지 를 검토하였다. 『셩교요리문답』과 긴밀하게 연관된 교리문답서들이 자료 에서 확인되는 시기는 1850년대 중반이다. 이 교리문답서들은 1856년 이 전, 조선에 전해져 한글로 번역되었다. 둘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간행 연도를 규명하였다. 지금까지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기존의 통설을 분석한 결과, 자료 해석상의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1864년에 간행된 서적에는 있는 간기(刊記)가 『셩교요리문답』에는 없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명확한 간행 연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문서를 검토하였고, 그 결과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이 아니라 1861년에 간행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셋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그 주요 저본이 되는 『聖敎要理問答』(1844년 중간본)와 대조하였다.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은 『聖敎要理問答』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한문본의 내용이 빠지기도 했고, 한문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을 만들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 베르뇌 주교나 다블뤼 주교가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사항 등이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
{"title":"A Study on the woodblock edition of Catholic catechism Seonggyo Yori Mundap","authors":"In Seong Yang","doi":"10.35135/casky.2023.23.133","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133","url":null,"abstract":"『셩교요리문답』은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의 교리문답서(敎理問答書)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1860년대에 목판본이 간행된 후에 1934년 『천주 교 요리문답』이 나올 때까지 70여 년간 한국 천주교회 공식 교리서로 사 용되었다. 이처럼 『셩교요리문답』이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 지만 여전히 규명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첫째, 『셩교요리문답』과 연관된 교리서가 언제 조선에 유입되었는지 를 검토하였다. 『셩교요리문답』과 긴밀하게 연관된 교리문답서들이 자료 에서 확인되는 시기는 1850년대 중반이다. 이 교리문답서들은 1856년 이 전, 조선에 전해져 한글로 번역되었다. 둘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간행 연도를 규명하였다. 지금까지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기존의 통설을 분석한 결과, 자료 해석상의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1864년에 간행된 서적에는 있는 간기(刊記)가 『셩교요리문답』에는 없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명확한 간행 연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문서를 검토하였고, 그 결과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이 아니라 1861년에 간행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셋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그 주요 저본이 되는 『聖敎要理問答』(1844년 중간본)와 대조하였다.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은 『聖敎要理問答』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한문본의 내용이 빠지기도 했고, 한문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을 만들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 베르뇌 주교나 다블뤼 주교가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사항 등이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5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35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9-30DOI: 10.35135/casky.2023.23.205
JeongHyun Kim
가톨릭 교회는 3년이나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 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 회는 한국전쟁 기간 반공주의가 강화되고 한국전쟁을 성전(聖戰)이나 십 자군 전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냉전과 종교의 관계를 거시적 인 조망에서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고 공산 주의를 만났던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 닌다. 고난을 당한 선교사들이 체험하고 남긴 기록은, 한국전쟁을 악마와 대 결을 벌이는 성전으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골롬반외방 선교회는 전쟁 당시 납북되거나 사망한 선교사들에 대한 조사보고, 정전협상과 포로석방을 위한 노력, 전시 선교 현황보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문서 관련 연구는, 메리놀선교회, 베네딕도회, 골롬반회의 활동과 자료소개 등 각 수도회와 외방선교회 별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글은 거의 없다. 이 글은 각 수도회 선교사들이 죽음의 행진을 겪고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남긴 수기와 골롬반 문서를 추가하여, 남북한 각 수도회 선교사들의 수용소 생활, 정전 협상과 석방 과정, 남한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보았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이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태도와 실천으로 선교 사명을 이루어 나갔는지, 전쟁 기간 선교사들이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알아보았다. 죽음의 행진을 겪고 생환한 선교사들의 수기에는 순교를 서술하면서도 반공이나 냉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성찰을 보여주었다. 선교사들의 납북 체험기와 증언에는 순교 정신과 용서와 회개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전쟁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선교와 신앙의 실천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선교사들의 순교와 1953-54년 수용소에서 선교사들이 석방되어 생환한 소식은 각 수도회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고국인 미국·프랑스·독일·벨기에·영국·아일랜드·호주 등지에서도 대서 특필되었다. 납북 선교사들이 남긴 생생한 수기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번역되고 주목을 받았다. 본국의 수도회와 가톨릭 신자들은 생환된 선교사들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후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선교의 행진을 벌일 때,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수난과 순교는 전시 남한에서의 선교와 구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기반이자 추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title":"Martyrdom and Mission of Foreign Missionaries during the Korean War","authors":"JeongHyun Kim","doi":"10.35135/casky.2023.23.205","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205","url":null,"abstract":"가톨릭 교회는 3년이나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 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 회는 한국전쟁 기간 반공주의가 강화되고 한국전쟁을 성전(聖戰)이나 십 자군 전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냉전과 종교의 관계를 거시적 인 조망에서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고 공산 주의를 만났던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 닌다. 고난을 당한 선교사들이 체험하고 남긴 기록은, 한국전쟁을 악마와 대 결을 벌이는 성전으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골롬반외방 선교회는 전쟁 당시 납북되거나 사망한 선교사들에 대한 조사보고, 정전협상과 포로석방을 위한 노력, 전시 선교 현황보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문서 관련 연구는, 메리놀선교회, 베네딕도회, 골롬반회의 활동과 자료소개 등 각 수도회와 외방선교회 별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글은 거의 없다. 이 글은 각 수도회 선교사들이 죽음의 행진을 겪고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남긴 수기와 골롬반 문서를 추가하여, 남북한 각 수도회 선교사들의 수용소 생활, 정전 협상과 석방 과정, 남한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보았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이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태도와 실천으로 선교 사명을 이루어 나갔는지, 전쟁 기간 선교사들이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알아보았다. 죽음의 행진을 겪고 생환한 선교사들의 수기에는 순교를 서술하면서도 반공이나 냉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성찰을 보여주었다. 선교사들의 납북 체험기와 증언에는 순교 정신과 용서와 회개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전쟁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선교와 신앙의 실천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선교사들의 순교와 1953-54년 수용소에서 선교사들이 석방되어 생환한 소식은 각 수도회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고국인 미국·프랑스·독일·벨기에·영국·아일랜드·호주 등지에서도 대서 특필되었다. 납북 선교사들이 남긴 생생한 수기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번역되고 주목을 받았다. 본국의 수도회와 가톨릭 신자들은 생환된 선교사들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후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선교의 행진을 벌일 때,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수난과 순교는 전시 남한에서의 선교와 구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기반이자 추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20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35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9-30DOI: 10.35135/casky.2023.23.253
Jae-Koo Ji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열두 사도와 다른 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선포한 복음은 온갖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 다. 이와 함께, 고립된 장소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나기도 했다. 세상을 등지고 황량한 곳으로 들어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사막운동은 육체적 욕망을 버리는 단 식과 혹독한 금욕생활을 동반한 급진적인 형태의 묵상과 기도가 수행의 기준이 되었다. 이 운동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금욕적 생활 방식 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에 수도승들은 동굴이나 사막의 적절한 은신처에서 스스로 개인적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다 점차 그들 중 일부가 때때로 기도와 식사를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은둔적 성격의 사막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사회와 분리된 황량하고 정적인 사막 분위기에서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을 수용해 나가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분명한 사실은 수천 명의 남녀가 참여했던 사막 운동이 영적인 삶을 담아낼 은총의 그릇을 만들며 교회와 세상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증인이 되는 생생한 인물이 바로 파코미우스(292-346 AD) 성인이다. 성인은 새로운 형태의 공주 수도원 공동체(coenobitic life)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는 수도자들이 교회 및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것을 촉진하며 기존의 사막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파코미우스 성인은 오늘날 세계 가톨릭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삶의 기준에 주춧돌을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역사 안에 파코미우스 성인이 남기신 유산과 그 가치는 실로 탁월하다 할 수 있겠다.
{"title":"A Study on Coenobitic Monasticism: Focusing on the Life and Spirituality of St. Pachomius the Great (292~346 AD)","authors":"Jae-Koo Ji","doi":"10.35135/casky.2023.23.253","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253","url":null,"abstract":"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열두 사도와 다른 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선포한 복음은 온갖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 다. 이와 함께, 고립된 장소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나기도 했다. 세상을 등지고 황량한 곳으로 들어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사막운동은 육체적 욕망을 버리는 단 식과 혹독한 금욕생활을 동반한 급진적인 형태의 묵상과 기도가 수행의 기준이 되었다. 이 운동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금욕적 생활 방식 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에 수도승들은 동굴이나 사막의 적절한 은신처에서 스스로 개인적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다 점차 그들 중 일부가 때때로 기도와 식사를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은둔적 성격의 사막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사회와 분리된 황량하고 정적인 사막 분위기에서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을 수용해 나가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분명한 사실은 수천 명의 남녀가 참여했던 사막 운동이 영적인 삶을 담아낼 은총의 그릇을 만들며 교회와 세상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증인이 되는 생생한 인물이 바로 파코미우스(292-346 AD) 성인이다. 성인은 새로운 형태의 공주 수도원 공동체(coenobitic life)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는 수도자들이 교회 및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것을 촉진하며 기존의 사막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파코미우스 성인은 오늘날 세계 가톨릭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삶의 기준에 주춧돌을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역사 안에 파코미우스 성인이 남기신 유산과 그 가치는 실로 탁월하다 할 수 있겠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4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19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