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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最新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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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ypology of Sunggyo Gamryak 圣桥甘柳的类型学研究
Pub Date : 2023-09-30 DOI: 10.35135/casky.2023.23.165
Hong Il Kim
중국 선교는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한 이후 선교수도회가 관할하게 되었다. 선교수도회 소속의 프랑스 신부이자 베이징 주교 루이 가브리엘 들라플라스는 선교를 위해 다양한 책을 저술하고 간행했다. 『성교감략』은 구약성경, 신약성경,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중국 교회사를 요약하고 있 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주로 사용한 모형론은 교 회 역사 가운데 계속된 전통이었으나, 근·현대의 역사비평으로 인해 성경 해석 방법론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성교감략』은 구약의 내용을 요 약한 후에 문답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해석했는데, 모형론적 해석이 주를 이룬다. 『성교감략』의 저술 동기는 첫째, 중국 선교를 위해 교리와 더불어 성경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둘째, 중국 내에서 아편전쟁과 홍 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는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신앙을 지킨 신앙인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들라플라스는 예수회가 사용했던 동방 선교 정책인 ‘적응주의’를 유지하고 계승하면서 지역 문화에 복음을 침투시키고자 했다. 넷째, 들라플라스는 글을 쉽게 써서 문자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교인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성교감략』은 중국에서 성경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경 번역에 대한 교황청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바쎄는 『바쎄역본』을 남겼고, 뿌와로는 『고신성경』을 남겼는데, 이들은 성경에 대한 번역이 주를 이룬다. 이에 반해 『성교감략』은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모형론을 통해 구약을 해석하고 있어서 성경 번역뿐만 아니라 명·청대 천주교의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성교감략』은 인물, 사건, 제도, 사물을 통해서 모형론적 해석을 했다.
在教皇厅解散耶稣会后,中国传教由传教修道会管辖。传教修道会的法国神父、北京主教路易·加布里埃尔·德拉普拉斯为传教撰写了多种书籍并发行。《性交监略》概括了旧约圣经、新约圣经、初期基督教和中国教会史。新约圣经的作者主要在解释旧约圣经时使用的模型论是教会历史中延续下来的传统,但由于近现代的历史批评,在圣经解释方法论上失去了立足之地。《性交监略》在约略旧约内容后,以问答的形式进行说明和解释,以模型论解释为主。《性交关系监略》的著述动机首先是为了中国传教,有必要和教理一起教育圣经。第二,中国国内因鸦片战争和洪水战的太平天国之乱,对基督教的迫害加深,有必要向基督教徒介绍在苦难中坚守信仰的信徒。第三,德拉普拉斯维持并继承了耶稣会曾使用过的东方传教政策“适应主义”,试图将福音渗透到地区文化中。第四,德拉普拉斯的文章写得很容易,即使是不懂文字的基督教徒也能很容易理解。《性交关系鉴略》在中国对圣经的翻译和解释具有重要意义。不顾教皇厅对圣经翻译的禁令,巴萨留下了《巴萨译本》,普瓦罗留下了《高神圣经》,他们主要是对圣经的翻译。与此相反,《性交关系鉴略》在对新旧约圣经内容进行概括解释的过程中,通过模型论来解释旧约,不仅是圣经翻译,也是体现明清天主教模型论性圣经解释的代表性文献。《性交监略》通过人物、事件、制度、事物进行模型论解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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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materials related to Lee Uichang Venantius 李宜昌天竺葵相关资料研究
Pub Date : 2023-09-30 DOI: 10.35135/casky.2023.23.37
Seok-won Lee
이 글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알려진 이의창 관련 자료를 검토함으로 써 그의 이름과 가계, 세례명, 교회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이의창 관련 자료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황해 감영과 포도청 문초 기 록, 1839년 문초 기록, 1884년 시복 재판 증언 기록, 광주이씨 족보와 남 인 당파 족보[南譜] 등으로 분류된다. 포도청 문초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이의창(李宜昌)[이기양의 손자, 이방억의 아들]이 1839년에 체포되지 않았다가 1846년 김대건 신 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의창의 이름과 가계를 광주이씨 족보나 남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에 제작된 『광주이씨족보』에는 이의창이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금압 시기에 족보 제작자들이 가문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내용 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19세기 말에 제작된 남보 중에는 이의창(李宜敞)으로 나온다. 남인 명가의 계보를 종합·정리하려 했던 남보 편집자들은 ‘사학’인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표기하여 공동으로 천주교에 대응·배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의창의 형제와 후손들에 대해서는 남보 자료마다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랑(베라노) 또는 베난시오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베라노란 세례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베난시오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20세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김대건 신부 서한의 인용·번역문에 혼선과 오류가 있어서 복사의 세례명이 ‘베난시오’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성인전’에는 베라노 성인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 성인만 확인된다. 교회측 기록에는 ‘베라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의 세레명을 가진 신자는 여러 명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난시오’가 이의창의 세례명일 것으로 보인다. 이의창은 1845년 1월에 김대건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의주-변문까지 갔던 안내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고, 소공동[석정동]에 자리잡은 김대건 신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김 신부를 수행·보좌했다. 1846년 5~6월에 이의창은 김 신부를 수행하여 황해 탐사에 동참했는데 김 신부의 지시로 한문 서한을 작성했으며 중국 배로 건너가 전달하는데도 참여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후 행적은 찾을 수 없다.
这篇文章以研究被认为是金大建神父复印的李义昌相关资料的形式,整理了他的名字、家世、洗礼名、教会活动。李义昌的相关资料分为金大建神父的书信、黄海监营和浦道厅文草记录、1839年文草记录、1884年时福审判证言记录、光州李氏族谱和南人党派族谱(南谱)等。1839年,光州李氏家族的李宜昌(李宜昌的孙子,李芳亿的儿子)在捕盗厅门草没有被捕,1846年被确认为金大建信府的房东兼复印员。在光州李氏族谱或南辅也可以确认李义昌的名字和家谱。1873年制作的《光州这个氏族谱》中没有李义昌。在天主教金压时期,族谱制作者有可能故意省略或缩小了家族和天主教之间有关联的内容。相反,在19世纪末制作的南宝中有李宜昌。想要综合整理南人名家家谱的《南报》编辑们可能是想标记与“私学”天主教的关联性,共同应对和排斥天主教。另一方面,对于李义昌的兄弟和后代,每个南保资料都显示出差异。根据现存的资料,他的洗礼名是贝朗(verano)或贝南西奥。到目前为止,薇拉黄色的洗礼名几乎没有被提及,只被称为贝南西奥。这是因为从20岁初开始至今出版的金大建神父的书信的引用和翻译文存在混乱和错误,复印的洗礼名被认为是“贝南西奥”。当时的《成人展》中没有出现贝拉诺圣人,只确认了贝南西奥圣人。在教会方面的记录中,没有出现具有“薇拉诺”教名的信徒,只有多名具有贝南西奥教名的信徒。因此,“贝南西奥”可能是李义昌的洗礼名。李义昌可能是1845年1月金大建进入朝鲜时前往义州-边门的向导之一,作为位于小公洞(石亭洞)的金大建神父的房主和牧师,安排信徒们的聚会,随行和辅佐金神父。1846年5月至6月,李义昌陪同金神父参加了黄海勘察,在金神父的指示下写了汉文书信,并参与了送中国船。金神父一行在被捕前下了船去了别的地方,但此后再也找不到行踪。
{"title":"A Study on materials related to Lee Uichang Venantius","authors":"Seok-won Lee","doi":"10.35135/casky.2023.23.37","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37","url":null,"abstract":"이 글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알려진 이의창 관련 자료를 검토함으로 써 그의 이름과 가계, 세례명, 교회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이의창 관련 자료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황해 감영과 포도청 문초 기 록, 1839년 문초 기록, 1884년 시복 재판 증언 기록, 광주이씨 족보와 남 인 당파 족보[南譜] 등으로 분류된다. 포도청 문초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이의창(李宜昌)[이기양의 손자, 이방억의 아들]이 1839년에 체포되지 않았다가 1846년 김대건 신 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의창의 이름과 가계를 광주이씨 족보나 남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에 제작된 『광주이씨족보』에는 이의창이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금압 시기에 족보 제작자들이 가문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내용 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19세기 말에 제작된 남보 중에는 이의창(李宜敞)으로 나온다. 남인 명가의 계보를 종합·정리하려 했던 남보 편집자들은 ‘사학’인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표기하여 공동으로 천주교에 대응·배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의창의 형제와 후손들에 대해서는 남보 자료마다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랑(베라노) 또는 베난시오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베라노란 세례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베난시오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20세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김대건 신부 서한의 인용·번역문에 혼선과 오류가 있어서 복사의 세례명이 ‘베난시오’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성인전’에는 베라노 성인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 성인만 확인된다. 교회측 기록에는 ‘베라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의 세레명을 가진 신자는 여러 명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난시오’가 이의창의 세례명일 것으로 보인다. 이의창은 1845년 1월에 김대건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의주-변문까지 갔던 안내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고, 소공동[석정동]에 자리잡은 김대건 신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김 신부를 수행·보좌했다. 1846년 5~6월에 이의창은 김 신부를 수행하여 황해 탐사에 동참했는데 김 신부의 지시로 한문 서한을 작성했으며 중국 배로 건너가 전달하는데도 참여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후 행적은 찾을 수 없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216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34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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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problems of the Father Choi Yang-eop's family reviewed through genealogy 从宗谱的角度考察了蔡阳业神父家的一些问题
Pub Date : 2023-09-30 DOI: 10.35135/casky.2023.23.5
Sang-Keun Bang
최양업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의 두 번째 방인(邦人) 사제로, 2016년 4월 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된 인물이다. 최 신부는 시복 대상자가 될 정도 로 한국교회에서의 위상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러한 위상에 걸맞게 그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어, 다양한 주제의 연구 성과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의 가계, 특히 최한일(최양업의 증조) 이전의 가계를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다. 물론 최한일 이전 세대는 천주교와 무관하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족 보 기록은 기존에 불명확했던 사항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족보를 활용하여 최양업 가문과 관련된 몇 가지 문 제들, 즉 “최양업 집안이 서울에 정착한 시기, 청양으로 이주한 이유, 김화 (金化, 즉 금성) 지역과의 관계, 이 가문에서 처음으로 신자가 된 최한일의 입교 과정과 양자설(養子說), 최양업 가문의 신분” 등에 대해 새롭게 정리해 보았다. 이 중에서 특히 최양업 가문의 신분이 서족(庶族)임을 밝힌 것은 이 글의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다.
崔良业神父是韩国天主教会的第二邦人司祭,2016年4月被宣布为“可敬者”。崔神父在韩国教会的地位非常高,甚至成为了施福对象。而且,为了符合这样的地位,对他的研究也很早就进行了,出现了多种主题的研究成果。但是到目前为止,几乎没有对崔洋业神父的家谱,特别是崔一一(崔洋业的曾祖)以前的家谱进行分析的研究。当然,崔韩一之前的一代与天主教无关。但是对他们的足报记录提供了能够说明之前不明确的事项的线索。在此,笔者利用族谱和崔杨业家族有关的几个问题,即"崔杨业家境定居在首尔的时期,移居青阳的理由,金花(金化",即金星)地区的关系,这一家族中第一次成为信徒的崔韩日的学校课程和双边春节(養子的)、崔杨业家族的身份"等问题,重新整理了一下。其中,特别表明崔洋业家族的身份是“西族”,可以说是这篇文章的巨大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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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woodblock edition of Catholic catechism Seonggyo Yori Mundap 《天主教教理》木刻版《圣教尤里蒙达》研究
Pub Date : 2023-09-30 DOI: 10.35135/casky.2023.23.133
In Seong Yang
『셩교요리문답』은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의 교리문답서(敎理問答書)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1860년대에 목판본이 간행된 후에 1934년 『천주 교 요리문답』이 나올 때까지 70여 년간 한국 천주교회 공식 교리서로 사 용되었다. 이처럼 『셩교요리문답』이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 지만 여전히 규명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첫째, 『셩교요리문답』과 연관된 교리서가 언제 조선에 유입되었는지 를 검토하였다. 『셩교요리문답』과 긴밀하게 연관된 교리문답서들이 자료 에서 확인되는 시기는 1850년대 중반이다. 이 교리문답서들은 1856년 이 전, 조선에 전해져 한글로 번역되었다. 둘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간행 연도를 규명하였다. 지금까지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기존의 통설을 분석한 결과, 자료 해석상의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1864년에 간행된 서적에는 있는 간기(刊記)가 『셩교요리문답』에는 없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명확한 간행 연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문서를 검토하였고, 그 결과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이 아니라 1861년에 간행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셋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그 주요 저본이 되는 『聖敎要理問答』(1844년 중간본)와 대조하였다.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은 『聖敎要理問答』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한문본의 내용이 빠지기도 했고, 한문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을 만들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 베르뇌 주교나 다블뤼 주교가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사항 등이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
《圣教料理问答》是朝鲜天主教会将中国的教义问答书翻译成韩文的书。1860年代木版本发行后,到1934年《天主教料理问答》出版为止的70多年间,被用作韩国天主教会的正式教理书。像这样,《圣教料理问答》在韩国天主教历史上虽然具有很大的意义,但是仍然有需要查明的问题。本文重点研究《圣桥料理问答》木版本。第一,检讨与《圣教料理问答》相关的教理书何时流入朝鲜。与《圣教料理问答》密切相关的教义问答书在资料中确认的时期是19世纪50年代中期。这些教义问答书在1856年李传至朝鲜,被翻译成韩文。第二,查明了《圣桥料理问答》木版本的刊行年份。迄今为止,人们认为《圣教料理问答》木版本是1864年发行的。但是对现有的通说进行分析的结果,发现资料解释上存在问题。此外,1864年出版的书籍中也没有《圣桥料理问答》中的刊记。为了掌握确切的出版年份,研究了伯努瓦主教和达布吕主教的文件,结果发现《圣教料理问答》的木版本不是在1864年而是在1861年出版的。第三,对《圣桥料理问答》木版本的特征进行了研究。为此,与其主要底本《圣旨要问》(1844年中间本)进行了对照。《圣教料理问答》木版本并没有直接翻译《圣要问询》。有时删除了汉文本的内容,有时增加了汉文本中没有的内容。这被认为是在制作《圣教料理问答》木版本的过程中,反映了朝鲜天主教会的情况、贝尔诺主教和达布吕主教对信徒们嘱咐的事项等。
{"title":"A Study on the woodblock edition of Catholic catechism Seonggyo Yori Mundap","authors":"In Seong Yang","doi":"10.35135/casky.2023.23.133","DOIUrl":"https://doi.org/10.35135/casky.2023.23.133","url":null,"abstract":"『셩교요리문답』은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의 교리문답서(敎理問答書)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1860년대에 목판본이 간행된 후에 1934년 『천주 교 요리문답』이 나올 때까지 70여 년간 한국 천주교회 공식 교리서로 사 용되었다. 이처럼 『셩교요리문답』이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 지만 여전히 규명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첫째, 『셩교요리문답』과 연관된 교리서가 언제 조선에 유입되었는지 를 검토하였다. 『셩교요리문답』과 긴밀하게 연관된 교리문답서들이 자료 에서 확인되는 시기는 1850년대 중반이다. 이 교리문답서들은 1856년 이 전, 조선에 전해져 한글로 번역되었다. 둘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간행 연도를 규명하였다. 지금까지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기존의 통설을 분석한 결과, 자료 해석상의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1864년에 간행된 서적에는 있는 간기(刊記)가 『셩교요리문답』에는 없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명확한 간행 연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문서를 검토하였고, 그 결과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이 1864년이 아니라 1861년에 간행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셋째,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그 주요 저본이 되는 『聖敎要理問答』(1844년 중간본)와 대조하였다.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은 『聖敎要理問答』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한문본의 내용이 빠지기도 했고, 한문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는 『셩교요리문답』 목판본을 만들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 베르뇌 주교나 다블뤼 주교가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사항 등이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5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12735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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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yrdom and Mission of Foreign Missionaries during the Korean War 朝鲜战争期间外国传教士的殉难与传教
Pub Date : 2023-09-30 DOI: 10.35135/casky.2023.23.205
JeongHyun Kim
가톨릭 교회는 3년이나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 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 회는 한국전쟁 기간 반공주의가 강화되고 한국전쟁을 성전(聖戰)이나 십 자군 전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냉전과 종교의 관계를 거시적 인 조망에서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고 공산 주의를 만났던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 닌다. 고난을 당한 선교사들이 체험하고 남긴 기록은, 한국전쟁을 악마와 대 결을 벌이는 성전으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골롬반외방 선교회는 전쟁 당시 납북되거나 사망한 선교사들에 대한 조사보고, 정전협상과 포로석방을 위한 노력, 전시 선교 현황보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문서 관련 연구는, 메리놀선교회, 베네딕도회, 골롬반회의 활동과 자료소개 등 각 수도회와 외방선교회 별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글은 거의 없다. 이 글은 각 수도회 선교사들이 죽음의 행진을 겪고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남긴 수기와 골롬반 문서를 추가하여, 남북한 각 수도회 선교사들의 수용소 생활, 정전 협상과 석방 과정, 남한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보았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이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태도와 실천으로 선교 사명을 이루어 나갔는지, 전쟁 기간 선교사들이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알아보았다. 죽음의 행진을 겪고 생환한 선교사들의 수기에는 순교를 서술하면서도 반공이나 냉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성찰을 보여주었다. 선교사들의 납북 체험기와 증언에는 순교 정신과 용서와 회개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전쟁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선교와 신앙의 실천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선교사들의 순교와 1953-54년 수용소에서 선교사들이 석방되어 생환한 소식은 각 수도회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고국인 미국·프랑스·독일·벨기에·영국·아일랜드·호주 등지에서도 대서 특필되었다. 납북 선교사들이 남긴 생생한 수기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번역되고 주목을 받았다. 본국의 수도회와 가톨릭 신자들은 생환된 선교사들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후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선교의 행진을 벌일 때,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수난과 순교는 전시 남한에서의 선교와 구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기반이자 추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天主教会因持续3年的韩国战争而遭到破坏和巨大损失。外国传教士没有去避难保护本堂和信徒,因此被北韩军队逮捕或牺牲。因此天主教会在韩国战争期间加强了反共主义,将韩国战争认识为圣殿或十子军战争。但是,从宏观角度分析冷战和宗教关系的现有研究无法反映组成基督教教会并会见共产主义的具体人士的“声音”,具有一定的局限性。遭受苦难的传教士体验并留下的记录,很难将韩国战争单纯化为与恶魔展开对决的圣殿。圣格罗姆班外方传教会留下了对战争当时被北绑架或死亡的传教士的调查报告、停战协商和为释放俘虏的努力、战时传教情况报告等记录。到目前为止,韩国战争时期传教士的活动和文件相关研究由梅里诺传教会、本笃会会、戈洛姆班会的活动和资料介绍等各修道会和外方传教会组成,几乎没有将此全部整理的文章。这篇文章各修道会传教士在死亡的行进,经历集中营获释留下的手记和球,增加罗姆班文书、南北韩各修道会的传教士的收容所生活,停战谈判和释放过程,在南韩重建教会传教士的努力如何持续重新看了他们的声音。通过这本书,我们了解了传教士在憎恶、敌对以及意识形态对立不得不加强的情况下,以怎样的态度和实践完成了传教使命,以及战争期间传教士为重建南韩教会所付出的努力。在经历死亡的行进后生还的传教士的手记中,在叙述殉教的同时,表现出了与反共和冷战意识形态无关的基督教的信仰和反省。传教士的被北绑架体验记和证言中包括殉教精神和宽恕和悔改的祈祷。在憎恶、敌对以及意识形态对立只能加强的战争状况下,传教士反而履行了不拘泥于意识形态的传教和实践信仰的使命。传教士的殉教和1953年至54年在收容所释放传教士生还的消息不仅在各修道会,在传教士的祖国美国、法国、德国、比利时、英国、爱尔兰、澳大利亚等地也被大肆报道。被北韩绑架的传教士留下的手记被翻译成英语、德语、法语,受到了关注。本国的修道会和天主教信徒在生还的传教士1953年7月签署停战协定后重新回到韩国进行传教游行时,积极支援他们。可以说,传教士的受难和殉教成为战时在南韩传教和救济事业蓬勃发展的基础和推动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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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Coenobitic Monasticism: Focusing on the Life and Spirituality of St. Pachomius the Great (292~346 AD) 共生体修道学研究——以圣帕科米乌斯大帝(公元292~346年)的生活和精神为中心
Pub Date : 2023-09-30 DOI: 10.35135/casky.2023.23.253
Jae-Koo Ji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열두 사도와 다른 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선포한 복음은 온갖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 다. 이와 함께, 고립된 장소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나기도 했다. 세상을 등지고 황량한 곳으로 들어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사막운동은 육체적 욕망을 버리는 단 식과 혹독한 금욕생활을 동반한 급진적인 형태의 묵상과 기도가 수행의 기준이 되었다. 이 운동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금욕적 생활 방식 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에 수도승들은 동굴이나 사막의 적절한 은신처에서 스스로 개인적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다 점차 그들 중 일부가 때때로 기도와 식사를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은둔적 성격의 사막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사회와 분리된 황량하고 정적인 사막 분위기에서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을 수용해 나가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분명한 사실은 수천 명의 남녀가 참여했던 사막 운동이 영적인 삶을 담아낼 은총의 그릇을 만들며 교회와 세상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증인이 되는 생생한 인물이 바로 파코미우스(292-346 AD) 성인이다. 성인은 새로운 형태의 공주 수도원 공동체(coenobitic life)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는 수도자들이 교회 및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것을 촉진하며 기존의 사막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파코미우스 성인은 오늘날 세계 가톨릭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삶의 기준에 주춧돌을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역사 안에 파코미우스 성인이 남기신 유산과 그 가치는 실로 탁월하다 할 수 있겠다.
基督死后复活升天后,十二使徒和其他诸徒开始向全世界宣布耶稣的福音,他们所宣布的福音不顾各种迫害传播到各地。与此同时,也出现了想要在孤立的地方与世隔绝,完全追随耶稣基督的人。沙漠运动始于脱离世界进入荒凉之地的少数人,他们舍弃肉体欲望的绝食和伴随着残酷的禁欲生活的激进形态的默想和祈祷成为修行的标准。许多参加这项运动的人都必须接受这种禁欲的生活方式。起初,修道僧们在洞穴或沙漠的适当藏身处过着自己的隐遁生活。渐渐地,他们中的一些人有时会聚集到一定的地方祈祷和用餐。这种隐遁性质的沙漠运动随着时间的流逝,特别是为了适应在与社会分离的荒凉而寂静的沙漠氛围中变化的现实,接受了越来越多的要素,进化为新的生活方式。可以肯定的是,数千名男女参与的沙漠运动创造了反映精神生活的恩钟,为教会和世界做出了贡献。而这个运动的见证人就是帕科米乌斯(292—346 AD)圣人。圣人为新形态的公州修道院共同体(coenobitic life)奠定了基础。它促进了修道者与教会和社会的重新联系,并引起了与以往的沙漠运动完全不同的新变化。由于这样的努力,帕科米乌斯圣人被评价为在当今世界天主教教会中,为修道会的生活标准奠定了基础,起到了重要的作用。因此,帕科米乌斯圣人在天主教教会历史中留下的遗产及其价值可以说非常卓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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期刊
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
全部 Acc. Chem. Res. ACS Applied Bio Materials ACS Appl. Electron. Mater. ACS Appl. Energy Mater. ACS Appl. Mater. Interfaces ACS Appl. Nano Mater. ACS Appl. Polym. Mater. ACS BIOMATER-SCI ENG ACS Catal. ACS Cent. Sci. ACS Chem. Biol. ACS Chemical Health & Safety ACS Chem. Neurosci. ACS Comb. Sci. ACS Earth Space Chem. ACS Energy Lett. ACS Infect. Dis. ACS Macro Lett. ACS Mater. Lett. ACS Med. Chem. Lett. ACS Nano ACS Omega ACS Photonics ACS Sens. ACS Sustainable Chem. Eng. ACS Synth. Biol. Anal. Chem. BIOCHEMISTRY-US Bioconjugate Chem. BIOMACROMOLECULES Chem. Res. Toxicol. Chem. Rev. Chem. Mater. CRYST GROWTH DES ENERG FUEL Environ. Sci. Technol. Environ. Sci. Technol. Lett. Eur. J. Inorg. Chem. IND ENG CHEM RES Inorg. Chem. J. Agric. Food. Chem. J. Chem. Eng. Data J. Chem. Educ. J. Chem. Inf. Model. J. Chem. Theory Comput. J. Med. Chem. J. Nat. Prod. J PROTEOME RES J. Am. Chem. Soc. LANGMUIR MACROMOLECULES Mol. Pharmaceutics Nano Lett. Org. Lett. ORG PROCESS RES DEV ORGANOMETALLICS J. Org. Chem. J. Phys. Chem. J. Phys. Chem. A J. Phys. Chem. B J. Phys. Chem. C J. Phys. Chem. Lett. Analyst Anal. Methods Biomater. Sci. Catal. Sci. Technol. Chem. Commun. Chem. Soc. Rev. CHEM EDUC RES PRACT CRYSTENGCOMM Dalton Trans. Energy Environ. Sci. ENVIRON SCI-NANO ENVIRON SCI-PROC IMP ENVIRON SCI-WAT RES Faraday Discuss. Food Funct. Green Chem. Inorg. Chem. Front. Integr. Biol. J. Anal. At. Spectrom. J. Mater. Chem. A J. Mater. Chem. B J. Mater. Chem. C Lab Chip Mater. Chem. Front. Mater. Horiz. MEDCHEMCOMM Metallomics Mol. Biosyst. Mol. Syst. Des. Eng. Nanoscale Nanoscale Horiz. Nat. Prod. Rep. New J. Chem. Org. Biomol. Chem. Org. Chem. Front. PHOTOCH PHOTOBIO SCI PCCP Polym. C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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