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243
Chong-Myong Im
1946년 5월 상순 중국 송환자에게서 콜레라가 발병하기 시작한 부산 지역은 그달 중순 무렵 남조선에서 발병자 규모가 가장 큰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6월 중순 무렵부터 콜레라 환자 발생 증가 정도가 둔화하기 시작해, 하순 경에는 발병세가 적잖이 ‘약화’하였다. 부산 지역 발병 추이는 경상남도 군부(郡部) 지역과 타도(他道) 지역의 그것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인 콜레라의 발병 상황을 악화시켰던 6월 하순의 대홍수였다. 부산과 달리 홍수 피해가 심각하였던 군부(郡部) 지역에서는 콜레라 발병세가 증대·악화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콜레라가 부산 주변 지역으로, 또 경남 내륙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군부 지역 환자·사망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이와 같은 발병 동향을 보여준 경남 지역은 콜레라가 종식되던 그해 말 남조선의 10개 시·도 단위 지역 중 높은 순위의 누적 환자·사망자 규모를, 그러나 낮은 순위의 누계 발병·치명도를 보여주었다.BR 이처럼 요약되는 부산과 경남 지역 콜레라 확산 과정과 그 귀결은 여러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그 과정에는 세균학적, 자연적 요소와 함께 인문 지리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 국가적(national), 그리고 지역적(local) 수준에서의 정치적 요인 등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구축이라는 동아시아 권역(regional) 수준의 정치 또한 작동하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발생했던 1946년 콜레라 사태는 전후 동아시아 권역에서 제국의 시대로부터 민족의 시대로의 전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바로 이것이 콜레라 대유행의 전후 역사적 의미라 할 수 있다.
{"title":"The 1946 Cholera Pandemic in Pusan and Kyŏngnam, and the Post-Asian Pacific War Regional Politics of East Asia","authors":"Chong-Myong Im","doi":"10.52271/pkhs.2023.08.126.243","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243","url":null,"abstract":"1946년 5월 상순 중국 송환자에게서 콜레라가 발병하기 시작한 부산 지역은 그달 중순 무렵 남조선에서 발병자 규모가 가장 큰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6월 중순 무렵부터 콜레라 환자 발생 증가 정도가 둔화하기 시작해, 하순 경에는 발병세가 적잖이 ‘약화’하였다. 부산 지역 발병 추이는 경상남도 군부(郡部) 지역과 타도(他道) 지역의 그것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인 콜레라의 발병 상황을 악화시켰던 6월 하순의 대홍수였다. 부산과 달리 홍수 피해가 심각하였던 군부(郡部) 지역에서는 콜레라 발병세가 증대·악화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콜레라가 부산 주변 지역으로, 또 경남 내륙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군부 지역 환자·사망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이와 같은 발병 동향을 보여준 경남 지역은 콜레라가 종식되던 그해 말 남조선의 10개 시·도 단위 지역 중 높은 순위의 누적 환자·사망자 규모를, 그러나 낮은 순위의 누계 발병·치명도를 보여주었다.BR 이처럼 요약되는 부산과 경남 지역 콜레라 확산 과정과 그 귀결은 여러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그 과정에는 세균학적, 자연적 요소와 함께 인문 지리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 국가적(national), 그리고 지역적(local) 수준에서의 정치적 요인 등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구축이라는 동아시아 권역(regional) 수준의 정치 또한 작동하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발생했던 1946년 콜레라 사태는 전후 동아시아 권역에서 제국의 시대로부터 민족의 시대로의 전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바로 이것이 콜레라 대유행의 전후 역사적 의미라 할 수 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5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49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379
Young-Mi Won
1987년 6월항쟁 이후 일시적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한 공개적인 대중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9년 3월, 전국에 ‘민중학교’, ‘시민학교’, ‘민족학교’ 등의 이름으로 100여 개의 대중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울산에서도 울산민족학교가 개설되어 운영되었다.BR 울산민족학교가 생산한 자료, 실무자의 수첩 메모와 수강생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구술자료, 신문자료 등으로 울산민족학교의 설립 배경과 과정, 운영과 폐쇄, 울산민족학교가 울산지역 사회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를 추적하였다.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울사협)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울산지역 사회운동세력의 역량이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강화되었고, 이후 정치적 활동공간이 넓어지면서 기존의 비합법적인 활동 방식에서 벗어나 공개적인 대중활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설된 것이 울산민족학교였다. 울산민족학교는 정부당국의 탄압으로 1년 4개월 만에 활동을 중단하였지만, 울사협으로 모아졌던 울산의 지역사회운동이 부문운동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itle":"Ulsan Minjok Hakkyo and Local Social Movement","authors":"Young-Mi Won","doi":"10.52271/pkhs.2023.08.126.37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379","url":null,"abstract":"1987년 6월항쟁 이후 일시적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한 공개적인 대중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89년 3월, 전국에 ‘민중학교’, ‘시민학교’, ‘민족학교’ 등의 이름으로 100여 개의 대중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울산에서도 울산민족학교가 개설되어 운영되었다.BR 울산민족학교가 생산한 자료, 실무자의 수첩 메모와 수강생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구술자료, 신문자료 등으로 울산민족학교의 설립 배경과 과정, 운영과 폐쇄, 울산민족학교가 울산지역 사회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를 추적하였다.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울사협)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울산지역 사회운동세력의 역량이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강화되었고, 이후 정치적 활동공간이 넓어지면서 기존의 비합법적인 활동 방식에서 벗어나 공개적인 대중활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설된 것이 울산민족학교였다. 울산민족학교는 정부당국의 탄압으로 1년 4개월 만에 활동을 중단하였지만, 울사협으로 모아졌던 울산의 지역사회운동이 부문운동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5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145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465
Yong-Jin Hong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망과 급격한 인구감소를 초래하였다. 그것이 사회, 경제, 인구에 미친 영향도 막대했지만, 심성과 정신적 측면에 끼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14세기 후반에 나타난 여러 담론과 이미지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사실 죽음에 대한 담론과 이미지는 그 이전 시기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시기부터는 죽음과 관련한 표현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BR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원에서 죽음과 관련한 담론 및 이미지의 주제들, 예를 들어 ‘세 명의 죽은 자와 세 명의 산 자’, ‘죽음의 승리’, ‘죽음의 춤’, ‘선종의 방법’을 ‘모두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라는 범주로 나누어 살펴본다. 이후 14세기 후반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충격, 불안의 표현이 15세기에 이르러 보다 정형화되고 일상화되어 가는 모습을 추적한다. 또한 홀바인과 브뤼헐의 사례로 16세기에 죽음이 생활세계의 한 요소로 자리잡는 모습에 주목한다.BR이렇게 해서 흑사병이 몰고 온 대규모의 끔찍한 죽음에 대한 정신적 충격에 대해 14세기 후반 이후 중세 서유럽 사회가 보여준 독특한 대응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폭력성을 무력하게 만들어 죽음을 대상화시키는 방식이었다.
{"title":"Domestication of Death : Discourses and Images of Death after the Black Death in Western Medieval Europe","authors":"Yong-Jin Hong","doi":"10.52271/pkhs.2023.08.126.465","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465","url":null,"abstract":"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망과 급격한 인구감소를 초래하였다. 그것이 사회, 경제, 인구에 미친 영향도 막대했지만, 심성과 정신적 측면에 끼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14세기 후반에 나타난 여러 담론과 이미지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사실 죽음에 대한 담론과 이미지는 그 이전 시기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시기부터는 죽음과 관련한 표현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BR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원에서 죽음과 관련한 담론 및 이미지의 주제들, 예를 들어 ‘세 명의 죽은 자와 세 명의 산 자’, ‘죽음의 승리’, ‘죽음의 춤’, ‘선종의 방법’을 ‘모두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라는 범주로 나누어 살펴본다. 이후 14세기 후반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충격, 불안의 표현이 15세기에 이르러 보다 정형화되고 일상화되어 가는 모습을 추적한다. 또한 홀바인과 브뤼헐의 사례로 16세기에 죽음이 생활세계의 한 요소로 자리잡는 모습에 주목한다.BR이렇게 해서 흑사병이 몰고 온 대규모의 끔찍한 죽음에 대한 정신적 충격에 대해 14세기 후반 이후 중세 서유럽 사회가 보여준 독특한 대응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폭력성을 무력하게 만들어 죽음을 대상화시키는 방식이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13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6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