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1
Soo-Hyang Kim
본 연구는 전후복구기 한국 정부의 식량정책을 정부관리양곡 수급정책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전후복구기 정부는 군량과 공무원 현물봉급 등 관영 수요처에 배급하기 위해 평균 600만 석의 양곡이 필요했다. 정부가 한국전쟁기에 시작된 임시토지수득세와 농지상환곡 현물납부제도를 전후에도 유지한 까닭은 관영 수요처에 국산 양곡을 배급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현물납은 오직 정부에만 유리한 제도였다. 정부는 안정적으로 양곡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농민들은 현금보다 더 많은 가치의 현물을 납부했다. 농민의 대다수였던 영세·소농들은 수납으로 인해 충분한 자가식량이나 상품화할 양곡을 보유할 수 없었다. 전후복구기 정부가 양곡을 확보하는 다른 방법은 일반매상이었다. 일반매상의 본래 취지는 곡가 하락으로 인한 농민의 경제적손실을 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농민에게 지급하는 매상 가격을 시장가격은 물론 생산비보다도 낮게 책정하였다. 매상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국회와 정부의 줄다리기가 되풀이되었고, 실제 매상은 추수기가 한참 지난 후에야 시작되었다. 정부는 매상 가격을 낮추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고, 실적이 부진할때는 행정력을 동원하여 매상을 강제했다. 정부는 양곡 매상과 수납에 적용하는 공정가격을 시장 가격은 물론 생산비보다도 낮게 책정했다. 정부가 지출해야 하는 양곡 자금이 감소한 것은 물론 저곡가를 견인하여 물가상승을 견제할 수 있었다. 1955년 500:1의 환율 책정 이후 정부는 환율 유지를 위해 물가상승을 극도로 억제하였는데, 공정가격 또한 환율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처럼 전후복구기 정부관리양곡제도는 군사력 유지와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운용되었다. 농업 생산의 주체인 농민은 안정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고, 경제적 상황 또한 점차 악화되었다.
{"title":"Changes in Food Policy after the Korean War","authors":"Soo-Hyang Kim","doi":"10.52271/pkhs.2023.08.126.1","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1","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전후복구기 한국 정부의 식량정책을 정부관리양곡 수급정책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전후복구기 정부는 군량과 공무원 현물봉급 등 관영 수요처에 배급하기 위해 평균 600만 석의 양곡이 필요했다. 정부가 한국전쟁기에 시작된 임시토지수득세와 농지상환곡 현물납부제도를 전후에도 유지한 까닭은 관영 수요처에 국산 양곡을 배급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현물납은 오직 정부에만 유리한 제도였다. 정부는 안정적으로 양곡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농민들은 현금보다 더 많은 가치의 현물을 납부했다. 농민의 대다수였던 영세·소농들은 수납으로 인해 충분한 자가식량이나 상품화할 양곡을 보유할 수 없었다. 전후복구기 정부가 양곡을 확보하는 다른 방법은 일반매상이었다. 일반매상의 본래 취지는 곡가 하락으로 인한 농민의 경제적손실을 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농민에게 지급하는 매상 가격을 시장가격은 물론 생산비보다도 낮게 책정하였다. 매상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국회와 정부의 줄다리기가 되풀이되었고, 실제 매상은 추수기가 한참 지난 후에야 시작되었다. 정부는 매상 가격을 낮추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고, 실적이 부진할때는 행정력을 동원하여 매상을 강제했다. 정부는 양곡 매상과 수납에 적용하는 공정가격을 시장 가격은 물론 생산비보다도 낮게 책정했다. 정부가 지출해야 하는 양곡 자금이 감소한 것은 물론 저곡가를 견인하여 물가상승을 견제할 수 있었다. 1955년 500:1의 환율 책정 이후 정부는 환율 유지를 위해 물가상승을 극도로 억제하였는데, 공정가격 또한 환율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처럼 전후복구기 정부관리양곡제도는 군사력 유지와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운용되었다. 농업 생산의 주체인 농민은 안정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고, 경제적 상황 또한 점차 악화되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4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4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503
Seo-Kyung Roe
파리 코뮌의 유혈 진압 속에 망명길에 오른 코뮈나르의 구체적 경험은 어떠했으며 이 경험과 사색은 그들을 어떤 지향점으로 밀어갔을까. 이 글은 1870년대의 유럽 사회주의 연구가 요구하는 이 물음에 대해 부분적으로 답해보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코뮈나르 브누아 말롱의 행적을 검토하려 한다. 말롱의 망명에 관해서는 이미 분야별로 연구가 이뤄졌지만 이 글은 말롱의 경험과 사색에 1차 인터내셔널(1864∼1876)이 깔려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스위스 쥐라 연맹의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 이탈리아 아나키즘과 인터내셔널, 그리고 벨기에 인터내셔널의 주역이었던 세자르 드 파프의 문제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되었다. 글은 187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주의 세계에서 인터내셔널로 표출된 유럽적 갈등과 상황이 말롱의 사회주의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문제삼는다.
{"title":"Another Route of European Formation of Socialism : Benoît Malon (1871-1878)","authors":"Seo-Kyung Roe","doi":"10.52271/pkhs.2023.08.126.503","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503","url":null,"abstract":"파리 코뮌의 유혈 진압 속에 망명길에 오른 코뮈나르의 구체적 경험은 어떠했으며 이 경험과 사색은 그들을 어떤 지향점으로 밀어갔을까. 이 글은 1870년대의 유럽 사회주의 연구가 요구하는 이 물음에 대해 부분적으로 답해보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코뮈나르 브누아 말롱의 행적을 검토하려 한다. 말롱의 망명에 관해서는 이미 분야별로 연구가 이뤄졌지만 이 글은 말롱의 경험과 사색에 1차 인터내셔널(1864∼1876)이 깔려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스위스 쥐라 연맹의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 이탈리아 아나키즘과 인터내셔널, 그리고 벨기에 인터내셔널의 주역이었던 세자르 드 파프의 문제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되었다. 글은 187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주의 세계에서 인터내셔널로 표출된 유럽적 갈등과 상황이 말롱의 사회주의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문제삼는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16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7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159
Jung-Won Kang
본 연구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지기업이었던 王子製紙가 조선에 진출하는 과정과 기업의 성장이 식민도시의 성장을 견인하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분석하였다. 왕자제지는 1917년 신의주에 朝鮮製紙株式會社(이하 조선제지)를 설립하면서 조선에 진출했다. 압록강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조선제지를 설립했지만, 조선인 자본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인 자본 중심의 회사였다. 이후 전후 불황으로 왕자제지가 조선제지를 합병했지만 결국 경영악화로 휴업했다. 1925년 왕자제지 조선공장으로 생산을 재개했고, 신의주의 인프라와 조선총독부의 국유림 불하로 제지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면서 신의주 경제를 좌우했다. 왕자제지의 제지 생산은 일본의 제지 수요에 부응하면서 왕자제지의 기업이윤과 일본제국주의 성장을 뒷받침했다.BR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성장은 신의주의 발전과 실업 구제에도 ‘기여’했다. 왕자제지 공장이 들어선 신의주의 인프라 확장에 영향을 미쳤고, 국유림 年期賣却이 이루지는 각 사업구에도 산림사업소가 들어서면서 호황을 맞았다. 신의주의 유일한 제지공장으로 전체 생산액의 20%를 차지할 만큼 조선공장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왕자제지의 성장은 조선의 개발과 성장을 담보로 선순환,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수요가 최우선으로 고려되어 생산 재편되는 구조였고,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강조했던 임금절약은 신의주로 몰려드는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로 가능했다.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노동자들은 실업에서는 구제되었지만, 저임금과 하루 12시간 노동으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결국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견디지 못해 파업을 단행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흥 상공업 도시, 약진의 도시 신의주의 경제를 좌우했던 왕자제지의 ‘성장’에서 저임금 노동자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title":"Operation of Co., Ltd.’s Joseon Plant and the ‘Growth’ of the Paper Manufacturing Industry in Shinui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authors":"Jung-Won Kang","doi":"10.52271/pkhs.2023.08.126.15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159","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지기업이었던 王子製紙가 조선에 진출하는 과정과 기업의 성장이 식민도시의 성장을 견인하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분석하였다. 왕자제지는 1917년 신의주에 朝鮮製紙株式會社(이하 조선제지)를 설립하면서 조선에 진출했다. 압록강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조선제지를 설립했지만, 조선인 자본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인 자본 중심의 회사였다. 이후 전후 불황으로 왕자제지가 조선제지를 합병했지만 결국 경영악화로 휴업했다. 1925년 왕자제지 조선공장으로 생산을 재개했고, 신의주의 인프라와 조선총독부의 국유림 불하로 제지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면서 신의주 경제를 좌우했다. 왕자제지의 제지 생산은 일본의 제지 수요에 부응하면서 왕자제지의 기업이윤과 일본제국주의 성장을 뒷받침했다.BR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성장은 신의주의 발전과 실업 구제에도 ‘기여’했다. 왕자제지 공장이 들어선 신의주의 인프라 확장에 영향을 미쳤고, 국유림 年期賣却이 이루지는 각 사업구에도 산림사업소가 들어서면서 호황을 맞았다. 신의주의 유일한 제지공장으로 전체 생산액의 20%를 차지할 만큼 조선공장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왕자제지의 성장은 조선의 개발과 성장을 담보로 선순환,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수요가 최우선으로 고려되어 생산 재편되는 구조였고,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강조했던 임금절약은 신의주로 몰려드는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로 가능했다.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노동자들은 실업에서는 구제되었지만, 저임금과 하루 12시간 노동으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결국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견디지 못해 파업을 단행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흥 상공업 도시, 약진의 도시 신의주의 경제를 좌우했던 왕자제지의 ‘성장’에서 저임금 노동자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4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3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119
Yeong-Dal Seok
본 논문은 박계주라는 한 지식인의 삶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분기점으로 두고 조명하며, 그가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떤 생각과 판단으로 종군작가 및 작품 활동에 임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박계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조류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영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이전에는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친일적 성향’을 보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즉각 ‘항일적 색채’를 덧씌워 자신의 과거를 가리고자 했고 이후 ‘좌익’ 일색의 문단에도 적극 참여하고자 했다.BR 하지만 박계주는 이후 국내 문단이 ‘우익’의 분위기로 변화함에 따라, 그리고 곧 이어졌던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나 한국전쟁기에 그에게 붙여진 ‘잔류파’라는 딱지는 그의 과거 좌익 활동이력과 결부되어 일신상의 안전까지 위협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박계주의삶에 대해 다룬 선행 연구들은 그의 반공 수기 작성이나 종군작가 활동 등을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으로 평가해왔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 배경에 사상적결백을 보여야 했던 박계주의 절박함이 깔려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BR 한국전쟁기 이후 박계주는 전쟁 기간 동안 다져놓은 안전장치를 디딤돌로 삼아 자신에게 씌워진 ‘통속작가’라는 프레임을 벗고 진정한 작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분명 그에게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통속 소설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재편된 문단에서는 ‘좌익 성향을 가졌던 통속작가’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계주의 삶과 작품활동은 한국전쟁기 전후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많은 지식인들의 고민을 대변해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현실 영합과 자기 정당화, 그리고 생존을 위한 노력 사이에서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title":"The Experience of a ‘Remaining Group’ Writer on the Korean War and the His Changing Attitudes : A Study on Park Gye-Ju’s Anti-Communist Memoirs and the Naval Military Writers’ Group Activity","authors":"Yeong-Dal Seok","doi":"10.52271/pkhs.2023.08.126.11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119","url":null,"abstract":"본 논문은 박계주라는 한 지식인의 삶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분기점으로 두고 조명하며, 그가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떤 생각과 판단으로 종군작가 및 작품 활동에 임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박계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조류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영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이전에는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친일적 성향’을 보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즉각 ‘항일적 색채’를 덧씌워 자신의 과거를 가리고자 했고 이후 ‘좌익’ 일색의 문단에도 적극 참여하고자 했다.BR 하지만 박계주는 이후 국내 문단이 ‘우익’의 분위기로 변화함에 따라, 그리고 곧 이어졌던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나 한국전쟁기에 그에게 붙여진 ‘잔류파’라는 딱지는 그의 과거 좌익 활동이력과 결부되어 일신상의 안전까지 위협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박계주의삶에 대해 다룬 선행 연구들은 그의 반공 수기 작성이나 종군작가 활동 등을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으로 평가해왔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 배경에 사상적결백을 보여야 했던 박계주의 절박함이 깔려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BR 한국전쟁기 이후 박계주는 전쟁 기간 동안 다져놓은 안전장치를 디딤돌로 삼아 자신에게 씌워진 ‘통속작가’라는 프레임을 벗고 진정한 작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분명 그에게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통속 소설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재편된 문단에서는 ‘좌익 성향을 가졌던 통속작가’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계주의 삶과 작품활동은 한국전쟁기 전후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많은 지식인들의 고민을 대변해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현실 영합과 자기 정당화, 그리고 생존을 위한 노력 사이에서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10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5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81
Su-Hyeon Hong
본 연구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유엔군사령관 직속 기구로서 미국의 대한 원조를 집행했던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조직과 보건의료 원조를 분석함으로써 전후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정전협정을 전후하여 탄생한 KCAC은 유엔원조와 구분되는 미국의 원조기구임을 표명하고 유엔군사령부의 민사 관계 기능을 일원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KCAC은 전후 약 2년 반 동안 한국에서 미국의 보건의료 원조를 총책임지며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에 일정하게 기여했다. KCAC은 조직의 주요 임무였던 질병의 예방과 사회안정을 실현하기 위해 예방접종 대상을 확대하고 환경위생 사업을 강화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한국사회의 안정을,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보건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보건 부문의 ‘재건’을 위해 한국인 공중보건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KCAC은 공중보건원을 설치하여 기양성된 한국인 보건의료 인력에게 공중보건학을 학습시키고 이들의 전문성을 심화하고자 했다. KCAC이 추구했던 공중보건의 ‘재건’은 한국의 보건 부문을 전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문 보건인력을 중심으로 한 보건 질서의 수립을 지향한 것이었다. KCAC의 보건원조 활동은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보건의료 재건의 방향을 제시했으나, 조직 자체 역량에 의존한 결과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
{"title":"Postwar Health Assistance of 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 (KCAC) and the \"Rehabilitation\" of Public Health in Korea","authors":"Su-Hyeon Hong","doi":"10.52271/pkhs.2023.08.126.81","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81","url":null,"abstract":"본 연구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유엔군사령관 직속 기구로서 미국의 대한 원조를 집행했던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조직과 보건의료 원조를 분석함으로써 전후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정전협정을 전후하여 탄생한 KCAC은 유엔원조와 구분되는 미국의 원조기구임을 표명하고 유엔군사령부의 민사 관계 기능을 일원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KCAC은 전후 약 2년 반 동안 한국에서 미국의 보건의료 원조를 총책임지며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에 일정하게 기여했다. KCAC은 조직의 주요 임무였던 질병의 예방과 사회안정을 실현하기 위해 예방접종 대상을 확대하고 환경위생 사업을 강화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한국사회의 안정을,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보건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보건 부문의 ‘재건’을 위해 한국인 공중보건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KCAC은 공중보건원을 설치하여 기양성된 한국인 보건의료 인력에게 공중보건학을 학습시키고 이들의 전문성을 심화하고자 했다. KCAC이 추구했던 공중보건의 ‘재건’은 한국의 보건 부문을 전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문 보건인력을 중심으로 한 보건 질서의 수립을 지향한 것이었다. KCAC의 보건원조 활동은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보건의료 재건의 방향을 제시했으나, 조직 자체 역량에 의존한 결과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10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4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319
Eun-Ryeong Choi
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은 상위 계획인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과 더불어 1985년 건설부에서 승인된 부산시 도시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사업의 목적은 낙동강 하류부의 급증하는 생·공·농업 용수를 염해 피해 없이 지속 공급하고 동시에 하구 지역 종합개발계획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추진 배경으로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정책을 기초로 대외적 2차 석유파동의 경제적 난국을 해결하고 신군부의 정치적 안정화로써 활용된 측면이 있었다. 사업 시행 전 대규모 매립을 포함한 설계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범위가 완전히 축소된 새로운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낙동강 하구 철새도래지에 관한 국내외학자 및 자연보호 단체 등의 관심과 반발 그리고 차관 처인 세계은행의 압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BR그러나 기공식 이후 8개월 만에 계획은 다시 변경되어 매립지가 확대되었다. 확대된 토지의 이용 계획에서 정부와 부산시의 이견이 발생하였으나 부산시는 나아가 2차 확장매립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사업의 완료 시점이되자 정부는 2차 확장 매립지를 보류하는 조건으로 명지·녹산지구에 대규모매립을 본격화하였다. 결과적으로 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의 시작과 더불어 부산시는 열악한 도시구조를 해결하고 공업 용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행정 구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 일대에 동남권 개발사업인 남동임해공업단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부산의 외곽지역인 낙동강 하구에 ‘서부산’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title":"Construction of Nakdong River Estuary Bank and the Formation of ‘Seobusan’ Industrial Complex in the 1980s","authors":"Eun-Ryeong Choi","doi":"10.52271/pkhs.2023.08.126.31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319","url":null,"abstract":"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은 상위 계획인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과 더불어 1985년 건설부에서 승인된 부산시 도시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사업의 목적은 낙동강 하류부의 급증하는 생·공·농업 용수를 염해 피해 없이 지속 공급하고 동시에 하구 지역 종합개발계획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추진 배경으로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정책을 기초로 대외적 2차 석유파동의 경제적 난국을 해결하고 신군부의 정치적 안정화로써 활용된 측면이 있었다. 사업 시행 전 대규모 매립을 포함한 설계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범위가 완전히 축소된 새로운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낙동강 하구 철새도래지에 관한 국내외학자 및 자연보호 단체 등의 관심과 반발 그리고 차관 처인 세계은행의 압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BR그러나 기공식 이후 8개월 만에 계획은 다시 변경되어 매립지가 확대되었다. 확대된 토지의 이용 계획에서 정부와 부산시의 이견이 발생하였으나 부산시는 나아가 2차 확장매립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사업의 완료 시점이되자 정부는 2차 확장 매립지를 보류하는 조건으로 명지·녹산지구에 대규모매립을 본격화하였다. 결과적으로 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의 시작과 더불어 부산시는 열악한 도시구조를 해결하고 공업 용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행정 구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 일대에 동남권 개발사업인 남동임해공업단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부산의 외곽지역인 낙동강 하구에 ‘서부산’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7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7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199
Kyoung-A Chu
관동군의 만주침략으로 파견된 리튼 조사단은 보고서에서 재만 조선인을 중일분쟁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재만 조선인은 양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그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기민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문제의 원인으로만 규정한 채 소수민족과 관련한 문제의 결정을 중일 양국교섭 결과로 남겨두어야 함을 명시하여 재만 조선인의 삶을 전과 다름없도록 했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 속에서 태어난 국제연맹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민과 다름없던 식민지민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title":"The Perceptions of Koreans in Manchuria in the Early 1930s in the Lytton Report","authors":"Kyoung-A Chu","doi":"10.52271/pkhs.2023.08.126.19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199","url":null,"abstract":"관동군의 만주침략으로 파견된 리튼 조사단은 보고서에서 재만 조선인을 중일분쟁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재만 조선인은 양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그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기민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문제의 원인으로만 규정한 채 소수민족과 관련한 문제의 결정을 중일 양국교섭 결과로 남겨두어야 함을 명시하여 재만 조선인의 삶을 전과 다름없도록 했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 속에서 태어난 국제연맹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민과 다름없던 식민지민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4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50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539
Jae-Keon Yoo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자본주의를 천착하면서 그 탄생과 소멸에 대해서 실천적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시대의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작동원리에 따라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면서 문명의 대전환을 꿈꾸었던 점에서 일치한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종언을 먼저 예측했던 마르크스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왜실패했는지, 자본주의의 지속적 생명력의 원인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가운데 태동한 것이다. 이 글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소멸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을 큰 틀에서 돌아봄으로써 현재 지구적 현실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BR 마르크스는 잘 알려진 자본론 1권의 ‘본원적 축적’ 장에서 자본주의 발생사를 임노동계급의 형성사로 그려낸 바 있지만, 그 출현을 봉건제 붕괴 이후 진행된 진보적 추세가 역전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월러스틴도 본원적 축적론을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술회했는데, 그 역시 자본주의의 출현을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토지제도가 한층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추세가 역전된 것으로 파악해 마르크스와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다. 다만,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인류사에서 자본주의 출현이란 사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월러스틴은 그것을 인류사의 결정적인 퇴보라고 보면서, 비교적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역사가 역전되었다는 점과 그 이후의 엄청난 물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지리적 위계화와 양극화가 한층 심각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영소농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를 보였다. 그는 그것이 기반한 분산된 소경영 양식은 생산자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지만 단지 협소한 테두리에서만 조화로운 사회를 구성하리라 보았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그 체제는 계속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렵고 결국엔 자신을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창출해서 사회의 태내에서 이 소경영 생산양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힘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리라는 것이다.BR 그렇다면 자본주의 탄생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끔찍스러웠어도 그 다음 인류사의 대전환을 위해 어차피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는 19세기 중엽의 마르크스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고 그래서 지금껏 80% 넘는 세계 민중에게 고통을 주었던 퇴보의 길이었다는 20세기 말의 월러스틴, 과연 누구의 관점이 타당할까? 그 판단을 위해선 두 사람이 각기 그 소멸의 대전환을 어찌 상상하고 모색하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title":"On the Origin and the End of Capitalism : Views of K. Marx and I. Wallerstein","authors":"Jae-Keon Yoo","doi":"10.52271/pkhs.2023.08.126.53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539","url":null,"abstract":"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자본주의를 천착하면서 그 탄생과 소멸에 대해서 실천적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시대의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작동원리에 따라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면서 문명의 대전환을 꿈꾸었던 점에서 일치한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종언을 먼저 예측했던 마르크스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왜실패했는지, 자본주의의 지속적 생명력의 원인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가운데 태동한 것이다. 이 글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소멸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을 큰 틀에서 돌아봄으로써 현재 지구적 현실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BR 마르크스는 잘 알려진 자본론 1권의 ‘본원적 축적’ 장에서 자본주의 발생사를 임노동계급의 형성사로 그려낸 바 있지만, 그 출현을 봉건제 붕괴 이후 진행된 진보적 추세가 역전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월러스틴도 본원적 축적론을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술회했는데, 그 역시 자본주의의 출현을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토지제도가 한층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추세가 역전된 것으로 파악해 마르크스와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다. 다만,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인류사에서 자본주의 출현이란 사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월러스틴은 그것을 인류사의 결정적인 퇴보라고 보면서, 비교적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역사가 역전되었다는 점과 그 이후의 엄청난 물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지리적 위계화와 양극화가 한층 심각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영소농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를 보였다. 그는 그것이 기반한 분산된 소경영 양식은 생산자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지만 단지 협소한 테두리에서만 조화로운 사회를 구성하리라 보았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그 체제는 계속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렵고 결국엔 자신을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창출해서 사회의 태내에서 이 소경영 생산양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힘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리라는 것이다.BR 그렇다면 자본주의 탄생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끔찍스러웠어도 그 다음 인류사의 대전환을 위해 어차피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는 19세기 중엽의 마르크스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고 그래서 지금껏 80% 넘는 세계 민중에게 고통을 주었던 퇴보의 길이었다는 20세기 말의 월러스틴, 과연 누구의 관점이 타당할까? 그 판단을 위해선 두 사람이 각기 그 소멸의 대전환을 어찌 상상하고 모색하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2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51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429
Kyong-Joon Min
이 연구는 ‘생산에서 유통으로’라는 맥락이 아니라 ‘소비가 초래한 유통상의 변화’라는 맥락으로 역사 속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찾아낸 연구 소재의 하나가 청대 중국에서 고급 해산물 소비 붐을 일으킨 ‘해선(海鮮) 요리’이다. 상류층이 주로 소비하는 해선요리의 붐은 고급 해산물의 대량 수입을 야기한다.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해삼 등 고급 해산물은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상품이 된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일본의 해산물이 중국으로 향하는 동북아 무역의 현상에만 주목한다. 청대 후기 18-19세기의 동아시아 무역을 보면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해산물의 양이 더 많다. 그럼에도 이 현상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 연구는 동남아산 고급 해산물 무역량 증대의 배경을 중국의 소비에서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선요리 조리법의 변화에 보이는 중국인의 음식 기호가 동남아산 해산물의 어떤 특징과 연결되는가 하는 관련성을 파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title":"Chinese Haixian(海鮮) Culinary Culture : Through Changes in Cooking Methods Regarding the Demand for Southeast Asian Product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authors":"Kyong-Joon Min","doi":"10.52271/pkhs.2023.08.126.42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429","url":null,"abstract":"이 연구는 ‘생산에서 유통으로’라는 맥락이 아니라 ‘소비가 초래한 유통상의 변화’라는 맥락으로 역사 속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찾아낸 연구 소재의 하나가 청대 중국에서 고급 해산물 소비 붐을 일으킨 ‘해선(海鮮) 요리’이다. 상류층이 주로 소비하는 해선요리의 붐은 고급 해산물의 대량 수입을 야기한다.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해삼 등 고급 해산물은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상품이 된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일본의 해산물이 중국으로 향하는 동북아 무역의 현상에만 주목한다. 청대 후기 18-19세기의 동아시아 무역을 보면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해산물의 양이 더 많다. 그럼에도 이 현상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 연구는 동남아산 고급 해산물 무역량 증대의 배경을 중국의 소비에서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선요리 조리법의 변화에 보이는 중국인의 음식 기호가 동남아산 해산물의 어떤 특징과 연결되는가 하는 관련성을 파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51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23-08-31DOI: 10.52271/pkhs.2023.08.126.43
Dong-Won Lee
암시장은 유사 이래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기지의 세계적 확산과 미국의 압도적 생산력에 기반한 미군PX의 확대, 여기서 파생된 암시장은 군표(MPC)의 활용, 상품 종류와 규모의 증대,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 면에서 기존의 암시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암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PX 및 대일 밀무역의 확대와 함께 1950년대에 ‘PX 경제’라고 불릴만한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후 한국의 암시장에서는 생필품, 의약품과 함께 유통 이윤이 높은 사치품이 주요 유통 대상이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군의 주둔과 미군 PX의 운영이 본격화되면서 그것이 한국의 암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암시장의 양적, 질적 확대가 한국 경제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조직적 밀수와 절도 등 각종 범죄에 기반한 ‘양키물자’, 즉 미제(美製)의 유통이 유엔군과 정부의 단속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화하여 한국인들의 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해명하고자 한다.
{"title":"U.S. Military PX Operations and the Evolution of the Black Market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authors":"Dong-Won Lee","doi":"10.52271/pkhs.2023.08.126.43","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43","url":null,"abstract":"암시장은 유사 이래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기지의 세계적 확산과 미국의 압도적 생산력에 기반한 미군PX의 확대, 여기서 파생된 암시장은 군표(MPC)의 활용, 상품 종류와 규모의 증대,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 면에서 기존의 암시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암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PX 및 대일 밀무역의 확대와 함께 1950년대에 ‘PX 경제’라고 불릴만한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후 한국의 암시장에서는 생필품, 의약품과 함께 유통 이윤이 높은 사치품이 주요 유통 대상이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군의 주둔과 미군 PX의 운영이 본격화되면서 그것이 한국의 암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암시장의 양적, 질적 확대가 한국 경제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조직적 밀수와 절도 등 각종 범죄에 기반한 ‘양키물자’, 즉 미제(美製)의 유통이 유엔군과 정부의 단속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화하여 한국인들의 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해명하고자 한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4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4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