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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gsa wa gyeong'gye最新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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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s in Food Policy after the Korean War 朝鲜战争后粮食政策的变化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1
Soo-Hyang Kim
본 연구는 전후복구기 한국 정부의 식량정책을 정부관리양곡 수급정책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전후복구기 정부는 군량과 공무원 현물봉급 등 관영 수요처에 배급하기 위해 평균 600만 석의 양곡이 필요했다. 정부가 한국전쟁기에 시작된 임시토지수득세와 농지상환곡 현물납부제도를 전후에도 유지한 까닭은 관영 수요처에 국산 양곡을 배급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현물납은 오직 정부에만 유리한 제도였다. 정부는 안정적으로 양곡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농민들은 현금보다 더 많은 가치의 현물을 납부했다. 농민의 대다수였던 영세·소농들은 수납으로 인해 충분한 자가식량이나 상품화할 양곡을 보유할 수 없었다. 전후복구기 정부가 양곡을 확보하는 다른 방법은 일반매상이었다. 일반매상의 본래 취지는 곡가 하락으로 인한 농민의 경제적손실을 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농민에게 지급하는 매상 가격을 시장가격은 물론 생산비보다도 낮게 책정하였다. 매상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국회와 정부의 줄다리기가 되풀이되었고, 실제 매상은 추수기가 한참 지난 후에야 시작되었다. 정부는 매상 가격을 낮추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고, 실적이 부진할때는 행정력을 동원하여 매상을 강제했다. 정부는 양곡 매상과 수납에 적용하는 공정가격을 시장 가격은 물론 생산비보다도 낮게 책정했다. 정부가 지출해야 하는 양곡 자금이 감소한 것은 물론 저곡가를 견인하여 물가상승을 견제할 수 있었다. 1955년 500:1의 환율 책정 이후 정부는 환율 유지를 위해 물가상승을 극도로 억제하였는데, 공정가격 또한 환율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처럼 전후복구기 정부관리양곡제도는 군사력 유지와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운용되었다. 농업 생산의 주체인 농민은 안정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고, 경제적 상황 또한 점차 악화되었다.
本研究以政府管理粮食供求政策为中心,分析了战后恢复期韩国政府的粮食政策。战后恢复期政府为了分配给官方需要处的军粮和公务员实物工资等,平均需要600万石粮食。政府在韩国战争时期开始的临时土地所得税和农地偿还粮实物缴纳制度前后也维持的原因是为了向官方需要处分配国产粮食。在战后通货膨胀的情况下,实物纳税是只对政府有利的制度。政府可以稳定地获得粮食,但农民缴纳的实物价值高于现金。农民的大多数是小农和小农,由于收缴,他们无法拥有足够的粮食或商品化的粮食。战后恢复期政府确保粮食的另一种方法是普通销售。一般销售的本来宗旨是防止粮价下跌给农民造成经济损失。但是,政府把支付给农民的销售价格定得低于市场价格和生产费用。国会和政府不断展开拉锯战,要求提高销售价格,实际销售直到秋收期过后才开始。政府为了降低销售价格,采取了变相手段,在业绩不佳时,则动用行政力量强制销售。政府将适用于粮食销售和收缴的公平价格定在了低于市场价格和生产费用的水平。政府支出的粮食资金不仅减少了,还可以带动低粮价,牵制物价上涨。1955年制定500:1的汇率后,政府为了维持汇率,极度抑制了物价上涨,公平价格也起到了维持汇率的手段的作用。像这样,战后恢复期的政府管理粮食制度是以维持军事力量和抑制通货膨胀为目标运用的。作为农业生产主体的农民无法享受稳定的饮食生活,经济状况也逐渐恶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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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Route of European Formation of Socialism : Benoît Malon (1871-1878) 欧洲形成社会主义的另一条路线:贝诺·<e:1>·马隆(1871-1878)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503
Seo-Kyung Roe
파리 코뮌의 유혈 진압 속에 망명길에 오른 코뮈나르의 구체적 경험은 어떠했으며 이 경험과 사색은 그들을 어떤 지향점으로 밀어갔을까. 이 글은 1870년대의 유럽 사회주의 연구가 요구하는 이 물음에 대해 부분적으로 답해보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코뮈나르 브누아 말롱의 행적을 검토하려 한다. 말롱의 망명에 관해서는 이미 분야별로 연구가 이뤄졌지만 이 글은 말롱의 경험과 사색에 1차 인터내셔널(1864∼1876)이 깔려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스위스 쥐라 연맹의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 이탈리아 아나키즘과 인터내셔널, 그리고 벨기에 인터내셔널의 주역이었던 세자르 드 파프의 문제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되었다. 글은 187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주의 세계에서 인터내셔널로 표출된 유럽적 갈등과 상황이 말롱의 사회주의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문제삼는다.
在巴黎公社的流血镇压下踏上流亡之路的科米纳尔的具体经验是怎样的?这一经验和思索将他们推向了怎样的方向?这篇文章是想部分回答十九世纪七十年代欧洲社会主义研究所要求的这个问题的一种尝试,以便研究科米纳尔夫·努阿马隆的行为。马隆的关于流亡,已经在各领域进行研究,但这篇文章马隆的经验与思考1次国际(1864—1876)铺满了这一点,着眼瑞士老鼠拉联盟的反权威主义国际无政府主义、意大利、国际以及比利时international的主角塞扎德派夫的问题有三个轴组成。文章提出了在19世纪70年代混乱的社会主义世界中,通过国际表现出来的欧洲矛盾和状况如何对马隆的社会主义形成起到作用的问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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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of Co., Ltd.’s Joseon Plant and the ‘Growth’ of the Paper Manufacturing Industry in Shinui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株式会社朝鲜工厂的运营与日本帝国主义强占时期新义州造纸业的“成长”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159
Jung-Won Kang
본 연구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지기업이었던 王子製紙가 조선에 진출하는 과정과 기업의 성장이 식민도시의 성장을 견인하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분석하였다. 왕자제지는 1917년 신의주에 朝鮮製紙株式會社(이하 조선제지)를 설립하면서 조선에 진출했다. 압록강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조선제지를 설립했지만, 조선인 자본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인 자본 중심의 회사였다. 이후 전후 불황으로 왕자제지가 조선제지를 합병했지만 결국 경영악화로 휴업했다. 1925년 왕자제지 조선공장으로 생산을 재개했고, 신의주의 인프라와 조선총독부의 국유림 불하로 제지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면서 신의주 경제를 좌우했다. 왕자제지의 제지 생산은 일본의 제지 수요에 부응하면서 왕자제지의 기업이윤과 일본제국주의 성장을 뒷받침했다.BR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성장은 신의주의 발전과 실업 구제에도 ‘기여’했다. 왕자제지 공장이 들어선 신의주의 인프라 확장에 영향을 미쳤고, 국유림 年期賣却이 이루지는 각 사업구에도 산림사업소가 들어서면서 호황을 맞았다. 신의주의 유일한 제지공장으로 전체 생산액의 20%를 차지할 만큼 조선공장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왕자제지의 성장은 조선의 개발과 성장을 담보로 선순환,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수요가 최우선으로 고려되어 생산 재편되는 구조였고,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강조했던 임금절약은 신의주로 몰려드는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로 가능했다.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노동자들은 실업에서는 구제되었지만, 저임금과 하루 12시간 노동으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결국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견디지 못해 파업을 단행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흥 상공업 도시, 약진의 도시 신의주의 경제를 좌우했던 왕자제지의 ‘성장’에서 저임금 노동자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本研究分析了日本代表性造纸企业王子制纸进入朝鲜的过程和企业的成长带动殖民城市成长的过程和意义。王子制纸于1917年在新义州成立了朝鲜造纸公司(以下简称朝鲜造纸),进军朝鲜。该公司以鸭绿江丰富的山林资源和低廉的劳动力为基础成立了朝鲜造纸公司,但没有朝鲜人资本参与,以日本资本为中心。此后,由于战后经济萧条,王子造纸公司合并了朝鲜造纸公司,但最终因经营恶化而停业。1925年以王子造纸造船工厂重新开始生产,并通过新义州基础设施和朝鲜总督府的国有林佛下稳定地生产造纸,左右了新义州经济。王子制纸的造纸生产适应了日本的造纸需求,支持了王子制纸的企业利润和日本帝国主义的成长。BR王子造纸造船工厂的成长对新义州的发展和失业救济也做出了“贡献”。这对王子造纸工厂进驻的新义州基础设施的扩张产生了影响,在国有林年度出现的各事业区也随着山林事业所的进驻,迎来了好景。作为新义州唯一的造纸厂,造船工厂的比重很大,占全体生产额的20%。但王子造纸的成长朝鲜开发和成长为担保的良性循环,投资的,而是日本国内需求,生产最优先考虑的结构重组,经营合理化的一环,工资曾强调节约是新义州涌入朝鲜人和中国人可能发生工人。王子造纸造船工厂的工人们虽然从失业中得到了救济,但却因低工资和每天12小时的劳动而饱受生活之苦。最终因无法承受日益上涨的物价而举行了罢工,但他们的要求没有被接受。在左右新兴工商业城市、跃进城市新主义经济的王子造纸的“增长”中,低工资劳动者被彻底排除在外。
{"title":"Operation of Co., Ltd.’s Joseon Plant and the ‘Growth’ of the Paper Manufacturing Industry in Shinui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authors":"Jung-Won Kang","doi":"10.52271/pkhs.2023.08.126.15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159","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지기업이었던 王子製紙가 조선에 진출하는 과정과 기업의 성장이 식민도시의 성장을 견인하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분석하였다. 왕자제지는 1917년 신의주에 朝鮮製紙株式會社(이하 조선제지)를 설립하면서 조선에 진출했다. 압록강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조선제지를 설립했지만, 조선인 자본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인 자본 중심의 회사였다. 이후 전후 불황으로 왕자제지가 조선제지를 합병했지만 결국 경영악화로 휴업했다. 1925년 왕자제지 조선공장으로 생산을 재개했고, 신의주의 인프라와 조선총독부의 국유림 불하로 제지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면서 신의주 경제를 좌우했다. 왕자제지의 제지 생산은 일본의 제지 수요에 부응하면서 왕자제지의 기업이윤과 일본제국주의 성장을 뒷받침했다.BR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성장은 신의주의 발전과 실업 구제에도 ‘기여’했다. 왕자제지 공장이 들어선 신의주의 인프라 확장에 영향을 미쳤고, 국유림 年期賣却이 이루지는 각 사업구에도 산림사업소가 들어서면서 호황을 맞았다. 신의주의 유일한 제지공장으로 전체 생산액의 20%를 차지할 만큼 조선공장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왕자제지의 성장은 조선의 개발과 성장을 담보로 선순환,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수요가 최우선으로 고려되어 생산 재편되는 구조였고,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강조했던 임금절약은 신의주로 몰려드는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로 가능했다.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노동자들은 실업에서는 구제되었지만, 저임금과 하루 12시간 노동으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결국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견디지 못해 파업을 단행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흥 상공업 도시, 약진의 도시 신의주의 경제를 좌우했던 왕자제지의 ‘성장’에서 저임금 노동자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4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3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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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perience of a ‘Remaining Group’ Writer on the Korean War and the His Changing Attitudes : A Study on Park Gye-Ju’s Anti-Communist Memoirs and the Naval Military Writers’ Group Activity 朝鲜战争“剩余群体”作家的经历及其态度的转变——以朴桂柱反共回忆录与海军军事作家群体活动为例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119
Yeong-Dal Seok
본 논문은 박계주라는 한 지식인의 삶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분기점으로 두고 조명하며, 그가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떤 생각과 판단으로 종군작가 및 작품 활동에 임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박계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조류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영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이전에는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친일적 성향’을 보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즉각 ‘항일적 색채’를 덧씌워 자신의 과거를 가리고자 했고 이후 ‘좌익’ 일색의 문단에도 적극 참여하고자 했다.BR 하지만 박계주는 이후 국내 문단이 ‘우익’의 분위기로 변화함에 따라, 그리고 곧 이어졌던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나 한국전쟁기에 그에게 붙여진 ‘잔류파’라는 딱지는 그의 과거 좌익 활동이력과 결부되어 일신상의 안전까지 위협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박계주의삶에 대해 다룬 선행 연구들은 그의 반공 수기 작성이나 종군작가 활동 등을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으로 평가해왔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 배경에 사상적결백을 보여야 했던 박계주의 절박함이 깔려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BR 한국전쟁기 이후 박계주는 전쟁 기간 동안 다져놓은 안전장치를 디딤돌로 삼아 자신에게 씌워진 ‘통속작가’라는 프레임을 벗고 진정한 작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분명 그에게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통속 소설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재편된 문단에서는 ‘좌익 성향을 가졌던 통속작가’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계주의 삶과 작품활동은 한국전쟁기 전후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많은 지식인들의 고민을 대변해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현실 영합과 자기 정당화, 그리고 생존을 위한 노력 사이에서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本论文以“韩国战争”这一历史事件为转折点,回顾了一位名叫朴桂会的知识分子的人生,并考察了他在时代变化的潮流中,以怎样的想法和判断投身于随军作家及作品活动。朴会长是生活在动荡时期,比任何人都积极迎合不断变化的时代潮流的人物。解放后,他在作品中一贯表现出“亲日倾向”,但解放后立即披上“抗日色彩”,试图掩盖自己的过去,此后还积极参与清一色“左翼”文坛。BR但是此后随着国内文坛转变为“右翼”的氛围,再加上紧接着发生的韩国战争事件,朴会长经历了相当大的考验。特别是在韩国战争时期给他贴上的“残留派”的标签,与他过去的左翼活动经历相联系,甚至威胁到了人身安全。至今在国内对朴接力的生活题材先行研究们他的反共手记起草或随军作家活动等自发意志的评价,但在本论文,其背景表现思想清白的朴接力的紧迫感要铺上了。”BR韩国战争时期以后,朴桂会以战争期间打下的安全装置为垫脚石,摆脱了套在自己身上的“通俗作家”的框架,为了成为真正的作家而不断努力。虽然给他带来名声和成功的是通俗小说,但在韩国战争以后重组的文坛中,他切实感受到作为“具有左翼倾向的通俗作家”是无法生存下去的。朴桂会的这种人生和作品活动反映了生活在韩国战争前后动荡时代的众多知识分子的苦恼,很好地表现了在迎合人类现实和自我正当化以及为生存而努力之间的苦恼。
{"title":"The Experience of a ‘Remaining Group’ Writer on the Korean War and the His Changing Attitudes : A Study on Park Gye-Ju’s Anti-Communist Memoirs and the Naval Military Writers’ Group Activity","authors":"Yeong-Dal Seok","doi":"10.52271/pkhs.2023.08.126.11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119","url":null,"abstract":"본 논문은 박계주라는 한 지식인의 삶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분기점으로 두고 조명하며, 그가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떤 생각과 판단으로 종군작가 및 작품 활동에 임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박계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조류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영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이전에는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친일적 성향’을 보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즉각 ‘항일적 색채’를 덧씌워 자신의 과거를 가리고자 했고 이후 ‘좌익’ 일색의 문단에도 적극 참여하고자 했다.BR 하지만 박계주는 이후 국내 문단이 ‘우익’의 분위기로 변화함에 따라, 그리고 곧 이어졌던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나 한국전쟁기에 그에게 붙여진 ‘잔류파’라는 딱지는 그의 과거 좌익 활동이력과 결부되어 일신상의 안전까지 위협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박계주의삶에 대해 다룬 선행 연구들은 그의 반공 수기 작성이나 종군작가 활동 등을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으로 평가해왔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 배경에 사상적결백을 보여야 했던 박계주의 절박함이 깔려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BR 한국전쟁기 이후 박계주는 전쟁 기간 동안 다져놓은 안전장치를 디딤돌로 삼아 자신에게 씌워진 ‘통속작가’라는 프레임을 벗고 진정한 작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분명 그에게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통속 소설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재편된 문단에서는 ‘좌익 성향을 가졌던 통속작가’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계주의 삶과 작품활동은 한국전쟁기 전후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많은 지식인들의 고민을 대변해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현실 영합과 자기 정당화, 그리고 생존을 위한 노력 사이에서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10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5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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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ar Health Assistance of 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 (KCAC) and the "Rehabilitation" of Public Health in Korea 韩国民间援助司令部(KCAC)的战后卫生援助与韩国公共卫生的“恢复”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81
Su-Hyeon Hong
본 연구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유엔군사령관 직속 기구로서 미국의 대한 원조를 집행했던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조직과 보건의료 원조를 분석함으로써 전후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정전협정을 전후하여 탄생한 KCAC은 유엔원조와 구분되는 미국의 원조기구임을 표명하고 유엔군사령부의 민사 관계 기능을 일원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KCAC은 전후 약 2년 반 동안 한국에서 미국의 보건의료 원조를 총책임지며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에 일정하게 기여했다. KCAC은 조직의 주요 임무였던 질병의 예방과 사회안정을 실현하기 위해 예방접종 대상을 확대하고 환경위생 사업을 강화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한국사회의 안정을,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보건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보건 부문의 ‘재건’을 위해 한국인 공중보건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KCAC은 공중보건원을 설치하여 기양성된 한국인 보건의료 인력에게 공중보건학을 학습시키고 이들의 전문성을 심화하고자 했다. KCAC이 추구했던 공중보건의 ‘재건’은 한국의 보건 부문을 전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문 보건인력을 중심으로 한 보건 질서의 수립을 지향한 것이었다. KCAC의 보건원조 활동은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보건의료 재건의 방향을 제시했으나, 조직 자체 역량에 의존한 결과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
本研究分析了1953年至1955年作为联合国军司令官直属机构执行美国对韩援助的韩国国民救助司令部(KCAC)的组织和保健医疗援助,以了解战后韩国公众保健的“重建”意义。KCAC成立于《停战协定》前后,旨在表明KCAC是有别于联合国援助的美国援助机构,并实现联合国军事司令部民事关系职能的一元化。KCAC在战后约2年半的时间里在韩国全权负责美国的保健医疗援助,为韩国公众保健的“重建”做出了一定贡献。KCAC为实现疾病预防和社会稳定,扩大预防接种对象并加强环境卫生事业,这是为了短期内稳定韩国社会,长期改善韩国保健环境。为了保健部门的“重建”,KCAC想培养韩国公众保健人才,并设立了公共保健院,让已培养好的韩国保健医疗人才学习公众保健学,以深化他们的专业性。KCAC追求的公众保健的“重建”并不仅仅停留在将韩国保健部门恢复到战前水平,而是指向建立以新的专门保健人力为中心的保健秩序。KCAC的保健援助活动自20世纪50年代中期以后,提示了韩国保健医疗重建的方向,但由于依赖于组织本身的力量,没有持续下去。
{"title":"Postwar Health Assistance of 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 (KCAC) and the \"Rehabilitation\" of Public Health in Korea","authors":"Su-Hyeon Hong","doi":"10.52271/pkhs.2023.08.126.81","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81","url":null,"abstract":"본 연구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유엔군사령관 직속 기구로서 미국의 대한 원조를 집행했던 한국민사원조사령부(KCAC)의 조직과 보건의료 원조를 분석함으로써 전후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정전협정을 전후하여 탄생한 KCAC은 유엔원조와 구분되는 미국의 원조기구임을 표명하고 유엔군사령부의 민사 관계 기능을 일원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KCAC은 전후 약 2년 반 동안 한국에서 미국의 보건의료 원조를 총책임지며 한국 공중보건의 ‘재건’에 일정하게 기여했다. KCAC은 조직의 주요 임무였던 질병의 예방과 사회안정을 실현하기 위해 예방접종 대상을 확대하고 환경위생 사업을 강화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한국사회의 안정을,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보건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보건 부문의 ‘재건’을 위해 한국인 공중보건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KCAC은 공중보건원을 설치하여 기양성된 한국인 보건의료 인력에게 공중보건학을 학습시키고 이들의 전문성을 심화하고자 했다. KCAC이 추구했던 공중보건의 ‘재건’은 한국의 보건 부문을 전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문 보건인력을 중심으로 한 보건 질서의 수립을 지향한 것이었다. KCAC의 보건원조 활동은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보건의료 재건의 방향을 제시했으나, 조직 자체 역량에 의존한 결과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10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4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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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ruction of Nakdong River Estuary Bank and the Formation of ‘Seobusan’ Industrial Complex in the 1980s 20世纪80年代洛东江河口岸的建设和西浮山工业园区的形成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319
Eun-Ryeong Choi
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은 상위 계획인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과 더불어 1985년 건설부에서 승인된 부산시 도시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사업의 목적은 낙동강 하류부의 급증하는 생·공·농업 용수를 염해 피해 없이 지속 공급하고 동시에 하구 지역 종합개발계획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추진 배경으로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정책을 기초로 대외적 2차 석유파동의 경제적 난국을 해결하고 신군부의 정치적 안정화로써 활용된 측면이 있었다. 사업 시행 전 대규모 매립을 포함한 설계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범위가 완전히 축소된 새로운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낙동강 하구 철새도래지에 관한 국내외학자 및 자연보호 단체 등의 관심과 반발 그리고 차관 처인 세계은행의 압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BR그러나 기공식 이후 8개월 만에 계획은 다시 변경되어 매립지가 확대되었다. 확대된 토지의 이용 계획에서 정부와 부산시의 이견이 발생하였으나 부산시는 나아가 2차 확장매립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사업의 완료 시점이되자 정부는 2차 확장 매립지를 보류하는 조건으로 명지·녹산지구에 대규모매립을 본격화하였다. 결과적으로 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의 시작과 더불어 부산시는 열악한 도시구조를 해결하고 공업 용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행정 구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 일대에 동남권 개발사업인 남동임해공업단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부산의 외곽지역인 낙동강 하구에 ‘서부산’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洛东江河口堤坝建设事业是与上游计划第2次国土综合开发计划、第5次经济社会发展计划和1985年建设部批准的釜山市城市计划相衔接进行的。该项目的目的是在不受盐害的情况下持续供应洛东江下游剧增的生、工、农业用水,同时促进河口地区综合开发计划。推进该计划的背景是,以国土综合开发计划这一国家政策为基础,解决了对外第2次石油波动的经济困难局面,并作为新军部的政治稳定化加以利用。项目实施前提出了包括大规模填埋在内的设计方案,但最终采纳了范围完全缩小的新设计方案。这是因为不能完全无视国内外学者及自然保护团体对洛东江河口候鸟栖息地的关心和抗议,以及作为贷款处的世界银行的压力。BR在开工仪式8个月后,计划再次变更,扩大了填埋地。对于扩大的土地利用计划,政府和釜山市出现了意见分歧,但釜山市甚至计划进行第二次扩张填埋。最终,工程结束后,政府以保留第二次扩张填埋地为条件,正式在明知、鹿山地区进行大规模填埋。结果,随着洛东江河口堤坝建设事业的开始,釜山市解决了恶劣的城市结构,确保了工业用地,进而扩大了行政区域。而且,政府在这一带建立了东南圈开发事业——南临海工业园区。就这样,在釜山的外围地区洛东江河口形成了“西釜山”产业园区。
{"title":"Construction of Nakdong River Estuary Bank and the Formation of ‘Seobusan’ Industrial Complex in the 1980s","authors":"Eun-Ryeong Choi","doi":"10.52271/pkhs.2023.08.126.31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319","url":null,"abstract":"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은 상위 계획인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과 더불어 1985년 건설부에서 승인된 부산시 도시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사업의 목적은 낙동강 하류부의 급증하는 생·공·농업 용수를 염해 피해 없이 지속 공급하고 동시에 하구 지역 종합개발계획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추진 배경으로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정책을 기초로 대외적 2차 석유파동의 경제적 난국을 해결하고 신군부의 정치적 안정화로써 활용된 측면이 있었다. 사업 시행 전 대규모 매립을 포함한 설계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범위가 완전히 축소된 새로운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낙동강 하구 철새도래지에 관한 국내외학자 및 자연보호 단체 등의 관심과 반발 그리고 차관 처인 세계은행의 압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BR그러나 기공식 이후 8개월 만에 계획은 다시 변경되어 매립지가 확대되었다. 확대된 토지의 이용 계획에서 정부와 부산시의 이견이 발생하였으나 부산시는 나아가 2차 확장매립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사업의 완료 시점이되자 정부는 2차 확장 매립지를 보류하는 조건으로 명지·녹산지구에 대규모매립을 본격화하였다. 결과적으로 낙동강하구둑 건설사업의 시작과 더불어 부산시는 열악한 도시구조를 해결하고 공업 용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행정 구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 일대에 동남권 개발사업인 남동임해공업단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부산의 외곽지역인 낙동강 하구에 ‘서부산’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7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37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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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ceptions of Koreans in Manchuria in the Early 1930s in the Lytton Report 《利顿报告》中对30年代初满洲朝鲜人的看法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199
Kyoung-A Chu
관동군의 만주침략으로 파견된 리튼 조사단은 보고서에서 재만 조선인을 중일분쟁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재만 조선인은 양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그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기민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문제의 원인으로만 규정한 채 소수민족과 관련한 문제의 결정을 중일 양국교섭 결과로 남겨두어야 함을 명시하여 재만 조선인의 삶을 전과 다름없도록 했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 속에서 태어난 국제연맹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민과 다름없던 식민지민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因关东军侵略满洲而被派遣的里顿调查团在报告书中将在万朝鲜人规定为中日纷争的原因。当时,大部分在万朝鲜人都没有得到两国的保护,只是为了生存而生活的基民一样的存在。尽管如此,只将问题的原因规定为问题的原因,明确指出应该将与少数民族相关的问题的决定作为中日两国交涉的结果来保留,使在满朝鲜人的生活和以前一样。这体现了当时在帝国主义列强的利害关系中诞生的国际联盟的局限性,也体现了帝国主义国家是如何看待与基民没有什么两样的殖民者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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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Origin and the End of Capitalism : Views of K. Marx and I. Wallerstein 论资本主义的起源与终结:马克思与沃勒斯坦的观点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539
Jae-Keon Yoo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자본주의를 천착하면서 그 탄생과 소멸에 대해서 실천적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시대의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작동원리에 따라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면서 문명의 대전환을 꿈꾸었던 점에서 일치한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종언을 먼저 예측했던 마르크스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왜실패했는지, 자본주의의 지속적 생명력의 원인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가운데 태동한 것이다. 이 글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소멸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을 큰 틀에서 돌아봄으로써 현재 지구적 현실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BR 마르크스는 잘 알려진 󰡔자본론󰡕 1권의 ‘본원적 축적’ 장에서 자본주의 발생사를 임노동계급의 형성사로 그려낸 바 있지만, 그 출현을 봉건제 붕괴 이후 진행된 진보적 추세가 역전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월러스틴도 본원적 축적론을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술회했는데, 그 역시 자본주의의 출현을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토지제도가 한층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추세가 역전된 것으로 파악해 마르크스와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다. 다만,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인류사에서 자본주의 출현이란 사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월러스틴은 그것을 인류사의 결정적인 퇴보라고 보면서, 비교적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역사가 역전되었다는 점과 그 이후의 엄청난 물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지리적 위계화와 양극화가 한층 심각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영소농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를 보였다. 그는 그것이 기반한 분산된 소경영 양식은 생산자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지만 단지 협소한 테두리에서만 조화로운 사회를 구성하리라 보았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그 체제는 계속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렵고 결국엔 자신을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창출해서 사회의 태내에서 이 소경영 생산양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힘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리라는 것이다.BR 그렇다면 자본주의 탄생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끔찍스러웠어도 그 다음 인류사의 대전환을 위해 어차피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는 19세기 중엽의 마르크스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고 그래서 지금껏 80% 넘는 세계 민중에게 고통을 주었던 퇴보의 길이었다는 20세기 말의 월러스틴, 과연 누구의 관점이 타당할까? 그 판단을 위해선 두 사람이 각기 그 소멸의 대전환을 어찌 상상하고 모색하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马克思和沃勒斯坦在100多年的时间里分别研究资本主义,对资本主义的诞生和消亡给予了实践性的关注。两人各自主张自己时代的资本主义只能根据自己的工作原理消失,并梦想着文明的大转变,这一点是一致的。沃勒斯坦的世界体制论是在首先预测资本主义终结的马克思失败的时候,在探索为什么失败、资本主义持续生命力的原因的过程中萌发的。这篇文章想从大的框架上回顾两人对资本主义的诞生和消灭的想法,从而创造对目前全球现实资本主义进行反省的契机。你们马克思是众所周知的󰡔资本论󰡕1卷的“原始积累”章中画作为资本主义발생사임노동阶级的形成,但他曾出现了封建制崩溃以后进行的进步趋势逆转的过程看做。曼努尔也在原始积累论马克思的思想对自己是最重要的”,他也是资本主义的出现,随着封建制度崩溃土地制度进一步走向平等的个体小农体制的趋势逆转的把握马克思和展现具有类似的认识。但是,马克思和沃勒斯汀在如何判断人类史上资本主义出现这一事态的问题上持不同立场。曼努尔是把它看成是人类历史的决定性的退步,比较平等的个体小农走向体制的历史逆转了这一点和他之后的巨大物质增长尽管阶级、地理警衔化和两极化进一步深刻地展开了,这一点值得关注。与此相反,马克思对个体小农体制的可持续发展表示怀疑。他认为,以它为基础的分散的小经营方式是生产者自由个性发展所必需的条件,但只能在狭小的范围内构成和谐的社会。在马克思看来,这种体制很难继续维持下去,最终会创造出破坏自己的物质手段,从而使在社会内部感到这种小经营生产方式的力量和热情开始行动起来。你们那么对于资本主义诞生,那就是不管怎么感到可怕,其次为人类公司转变,反正什么时候发生的事情的19世纪中叶的马克思和应没有发生的事,所以迄今为止,超过80%的世界给了民众痛苦的退步的长了20世纪末的曼努尔,究竟谁的观点妥当呢?为了做出这样的判断,两个人应该共同思考和探索各自消亡的大转变。
{"title":"On the Origin and the End of Capitalism : Views of K. Marx and I. Wallerstein","authors":"Jae-Keon Yoo","doi":"10.52271/pkhs.2023.08.126.53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539","url":null,"abstract":"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자본주의를 천착하면서 그 탄생과 소멸에 대해서 실천적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시대의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작동원리에 따라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면서 문명의 대전환을 꿈꾸었던 점에서 일치한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종언을 먼저 예측했던 마르크스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왜실패했는지, 자본주의의 지속적 생명력의 원인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가운데 태동한 것이다. 이 글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소멸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을 큰 틀에서 돌아봄으로써 현재 지구적 현실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BR 마르크스는 잘 알려진 󰡔자본론󰡕 1권의 ‘본원적 축적’ 장에서 자본주의 발생사를 임노동계급의 형성사로 그려낸 바 있지만, 그 출현을 봉건제 붕괴 이후 진행된 진보적 추세가 역전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월러스틴도 본원적 축적론을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술회했는데, 그 역시 자본주의의 출현을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토지제도가 한층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추세가 역전된 것으로 파악해 마르크스와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다. 다만,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인류사에서 자본주의 출현이란 사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월러스틴은 그것을 인류사의 결정적인 퇴보라고 보면서, 비교적 평등한 자영소농 체제로 나아가던 역사가 역전되었다는 점과 그 이후의 엄청난 물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계급적·지리적 위계화와 양극화가 한층 심각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영소농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를 보였다. 그는 그것이 기반한 분산된 소경영 양식은 생산자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지만 단지 협소한 테두리에서만 조화로운 사회를 구성하리라 보았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그 체제는 계속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렵고 결국엔 자신을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창출해서 사회의 태내에서 이 소경영 생산양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힘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리라는 것이다.BR 그렇다면 자본주의 탄생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끔찍스러웠어도 그 다음 인류사의 대전환을 위해 어차피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는 19세기 중엽의 마르크스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고 그래서 지금껏 80% 넘는 세계 민중에게 고통을 주었던 퇴보의 길이었다는 20세기 말의 월러스틴, 과연 누구의 관점이 타당할까? 그 판단을 위해선 두 사람이 각기 그 소멸의 대전환을 어찌 상상하고 모색하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2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51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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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Haixian(海鮮) Culinary Culture : Through Changes in Cooking Methods Regarding the Demand for Southeast Asian Product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中国海县饮食文化:从18世纪和19世纪对东南亚产品的需求看烹饪方法的变化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429
Kyong-Joon Min
이 연구는 ‘생산에서 유통으로’라는 맥락이 아니라 ‘소비가 초래한 유통상의 변화’라는 맥락으로 역사 속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찾아낸 연구 소재의 하나가 청대 중국에서 고급 해산물 소비 붐을 일으킨 ‘해선(海鮮) 요리’이다. 상류층이 주로 소비하는 해선요리의 붐은 고급 해산물의 대량 수입을 야기한다.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해삼 등 고급 해산물은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상품이 된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일본의 해산물이 중국으로 향하는 동북아 무역의 현상에만 주목한다. 청대 후기 18-19세기의 동아시아 무역을 보면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해산물의 양이 더 많다. 그럼에도 이 현상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 연구는 동남아산 고급 해산물 무역량 증대의 배경을 중국의 소비에서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선요리 조리법의 변화에 보이는 중국인의 음식 기호가 동남아산 해산물의 어떤 특징과 연결되는가 하는 관련성을 파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该研究不是以“从生产到流通”的脉络,而是以“消费导致的流通上的变化”的脉络来分析历史中的经济现象。为此,记者找到了在清代中国掀起高级海产品消费热潮的“海鲜料理”。上流阶层主要消费的海选料理的热潮导致了高级海产品的大量进口。燕窝、鱼翅、海参等高级海产品是东亚的主要贸易商品。但现有研究只关注日本海产品流向中国的东北亚贸易现象。从清代后期18 ~ 19世纪的东亚贸易来看,从东南亚到中国的海产品数量更多。但这一现象却没有受到关注。该研究从中国的消费中寻找东南亚产高级海产品贸易量增加的背景。具体来说,这也是为了掌握在海船料理烹饪方法的变化中,中国人的饮食喜好与东南亚海鲜的什么特征相联系的关联性。
{"title":"Chinese Haixian(海鮮) Culinary Culture : Through Changes in Cooking Methods Regarding the Demand for Southeast Asian Product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authors":"Kyong-Joon Min","doi":"10.52271/pkhs.2023.08.126.429","DOIUrl":"https://doi.org/10.52271/pkhs.2023.08.126.429","url":null,"abstract":"이 연구는 ‘생산에서 유통으로’라는 맥락이 아니라 ‘소비가 초래한 유통상의 변화’라는 맥락으로 역사 속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찾아낸 연구 소재의 하나가 청대 중국에서 고급 해산물 소비 붐을 일으킨 ‘해선(海鮮) 요리’이다. 상류층이 주로 소비하는 해선요리의 붐은 고급 해산물의 대량 수입을 야기한다.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해삼 등 고급 해산물은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상품이 된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일본의 해산물이 중국으로 향하는 동북아 무역의 현상에만 주목한다. 청대 후기 18-19세기의 동아시아 무역을 보면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해산물의 양이 더 많다. 그럼에도 이 현상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 연구는 동남아산 고급 해산물 무역량 증대의 배경을 중국의 소비에서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선요리 조리법의 변화에 보이는 중국인의 음식 기호가 동남아산 해산물의 어떤 특징과 연결되는가 하는 관련성을 파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PeriodicalId":497976,"journal":{"name":"Yeogsa wa gyeong'gye","volume":"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99251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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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Military PX Operations and the Evolution of the Black Market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朝鲜战争前后美国军用PX业务和黑市的演变
Pub Date : 2023-08-31 DOI: 10.52271/pkhs.2023.08.126.43
Dong-Won Lee
암시장은 유사 이래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기지의 세계적 확산과 미국의 압도적 생산력에 기반한 미군PX의 확대, 여기서 파생된 암시장은 군표(MPC)의 활용, 상품 종류와 규모의 증대,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 면에서 기존의 암시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암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PX 및 대일 밀무역의 확대와 함께 1950년대에 ‘PX 경제’라고 불릴만한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후 한국의 암시장에서는 생필품, 의약품과 함께 유통 이윤이 높은 사치품이 주요 유통 대상이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군의 주둔과 미군 PX의 운영이 본격화되면서 그것이 한국의 암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암시장의 양적, 질적 확대가 한국 경제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조직적 밀수와 절도 등 각종 범죄에 기반한 ‘양키물자’, 즉 미제(美製)의 유통이 유엔군과 정부의 단속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화하여 한국인들의 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해명하고자 한다.
暗示:有史以来世界任何地方都能找到的现象,但在第二次世界大战以后,美军基地的全球扩散和美国的压倒性的生产力为基础的美军px的扩大,这里暗示衍生、部长、(mpc)的运用,商品种类和规模的增加,对社区造成的影响方面,现有的黑市拥有完全不同的性质。韩国战争以后,随着美军PX及对日走私贸易的扩大,韩国的黑市在20世纪50年代扩大到可以称作“PX经济”的水平。另外,韩国战争以后,在韩国的黑市上,生活必需品、医药品和流通利润高的奢侈品是主要流通对象。本研究以这样的理解为基础,想了解随着美军的驻扎和美军PX的正式运营,它如何改变了韩国的黑市,黑市的量和质的扩大对韩国经济和社会产生了怎样的影响。另外,以有组织的走私和盗窃等各种犯罪为基础的“洋基物资”,即美制成品的流通,虽然联合国军和政府努力进行了管制,但是是如何进化并在韩国人的日常生活中扎根的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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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gsa wa gyeong'gye
全部 Acc. Chem. Res. ACS Applied Bio Materials ACS Appl. Electron. Mater. ACS Appl. Energy Mater. ACS Appl. Mater. Interfaces ACS Appl. Nano Mater. ACS Appl. Polym. Mater. ACS BIOMATER-SCI ENG ACS Catal. ACS Cent. Sci. ACS Chem. Biol. ACS Chemical Health & Safety ACS Chem. Neurosci. ACS Comb. Sci. ACS Earth Space Chem. ACS Energy Lett. ACS Infect. Dis. ACS Macro Lett. ACS Mater. Lett. ACS Med. Chem. Lett. ACS Nano ACS Omega ACS Photonics ACS Sens. ACS Sustainable Chem. Eng. ACS Synth. Biol. Anal. Chem. BIOCHEMISTRY-US Bioconjugate Chem. BIOMACROMOLECULES Chem. Res. Toxicol. Chem. Rev. Chem. Mater. CRYST GROWTH DES ENERG FUEL Environ. Sci. Technol. Environ. Sci. Technol. Lett. Eur. J. Inorg. Chem. IND ENG CHEM RES Inorg. Chem. J. Agric. Food. Chem. J. Chem. Eng. Data J. Chem. Educ. J. Chem. Inf. Model. J. Chem. Theory Comput. J. Med. Chem. J. Nat. Prod. J PROTEOME RES J. Am. Chem. Soc. LANGMUIR MACROMOLECULES Mol. Pharmaceutics Nano Lett. Org. Lett. ORG PROCESS RES DEV ORGANOMETALLICS J. Org. Chem. J. Phys. Chem. J. Phys. Chem. A J. Phys. Chem. B J. Phys. Chem. C J. Phys. Chem. Lett. Analyst Anal. Methods Biomater. Sci. Catal. Sci. Technol. Chem. Commun. Chem. Soc. Rev. CHEM EDUC RES PRACT CRYSTENGCOMM Dalton Trans. Energy Environ. Sci. ENVIRON SCI-NANO ENVIRON SCI-PROC IMP ENVIRON SCI-WAT RES Faraday Discuss. Food Funct. Green Chem. Inorg. Chem. Front. Integr. Biol. J. Anal. At. Spectrom. J. Mater. Chem. A J. Mater. Chem. B J. Mater. Chem. C Lab Chip Mater. Chem. Front. Mater. Horiz. MEDCHEMCOMM Metallomics Mol. Biosyst. Mol. Syst. Des. Eng. Nanoscale Nanoscale Horiz. Nat. Prod. Rep. New J. Chem. Org. Biomol. Chem. Org. Chem. Front. PHOTOCH PHOTOBIO SCI PCCP Polym. C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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