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 Date : 2019-06-01DOI: 10.17792/KCS.2019.36..291
황빛나
{"title":"'현모양처'의 탄생 이후, 이미지는 어떻게 여성의 삶을 통제해 왔는가?-이성례, 『담론과 이미지로 본 현모양처의 탄생』(역락, 2018)-","authors":"황빛나","doi":"10.17792/KCS.2019.36..291","DOIUrl":"https://doi.org/10.17792/KCS.2019.36..291","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9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154036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6-01DOI: 10.17792/KCS.2019.36..81
김태은
부산 녹산동에서 고려시대에 대단위 요업을 했던 가마터가 발굴조사되었다. 최초에 도기를 생산하다가 전환하여 청자를 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마를 이동하면서 상당기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총 5기의 가마와 그에 속한 폐기장이 조사되었다. 5만 점이 넘는 출토품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지리적으로 낙동강과 남해안 수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경남지역 일대에 청자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품 분석 결과 요업 성쇠 및 운영시기에 따른 유물의 양식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나 종류와 조형 면에서 비교적 다양하며, 장고·향완·잔탁·매병과 같은 위상 높은 기종이 다수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량의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주목된다. 문양의 수준과 다양성은 떨어지나, 철화를 장식한 기물의 종류와 양은 고려시대 대표적 철화청자 생산지였던 해남 진산리 요장과 비견할만하다. 또한 전세품이나 다른 가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녹산동 청자의 특징으로 금속기를 여럿 모방한 점, 도기와의 여러 유사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은 고려 중기 이후 전국 대부분 청자가마가 최고급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녹산동 가마는 경남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청자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편년의 표식 유물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이 보이지 않고 통형잔·팽이형잔·매병 등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 기종과 형식이 소수 보이기 때문에 운영시기 하한은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으로 제작된 기종과 형식에서 용운리 10호 Ⅰ층 및 Ⅱ층 가형식, 삼흥리 D지구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 전기적 특징을 주로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요업의 시작은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title":"부산 녹산동 고려시대 가마터 출토 청자의 특징과 의의","authors":"김태은","doi":"10.17792/KCS.2019.36..81","DOIUrl":"https://doi.org/10.17792/KCS.2019.36..81","url":null,"abstract":"부산 녹산동에서 고려시대에 대단위 요업을 했던 가마터가 발굴조사되었다. 최초에 도기를 생산하다가 전환하여 청자를 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마를 이동하면서 상당기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총 5기의 가마와 그에 속한 폐기장이 조사되었다. 5만 점이 넘는 출토품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지리적으로 낙동강과 남해안 수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경남지역 일대에 청자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u0000출토품 분석 결과 요업 성쇠 및 운영시기에 따른 유물의 양식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나 종류와 조형 면에서 비교적 다양하며, 장고·향완·잔탁·매병과 같은 위상 높은 기종이 다수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량의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주목된다. 문양의 수준과 다양성은 떨어지나, 철화를 장식한 기물의 종류와 양은 고려시대 대표적 철화청자 생산지였던 해남 진산리 요장과 비견할만하다. 또한 전세품이나 다른 가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녹산동 청자의 특징으로 금속기를 여럿 모방한 점, 도기와의 여러 유사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은 고려 중기 이후 전국 대부분 청자가마가 최고급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녹산동 가마는 경남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청자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u0000편년의 표식 유물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이 보이지 않고 통형잔·팽이형잔·매병 등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 기종과 형식이 소수 보이기 때문에 운영시기 하한은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으로 제작된 기종과 형식에서 용운리 10호 Ⅰ층 및 Ⅱ층 가형식, 삼흥리 D지구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 전기적 특징을 주로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요업의 시작은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56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328533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6-01DOI: 10.17792/KCS.2019.36..245
정병준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 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 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 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
{"title":"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authors":"정병준","doi":"10.17792/KCS.2019.36..245","DOIUrl":"https://doi.org/10.17792/KCS.2019.36..245","url":null,"abstract":"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u0000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u0000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u0000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u0000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034805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6-01DOI: 10.17792/KCS.2019.36..39
연남경
본고는 현대문학의 방향성이 모색되던 전후 문단 상황을 젠더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였다. 본고는 1959년에 있었던 짧지만 인상적인 논쟁에 주목하며 글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평론가 백철이 폄하한 작품 의 평가에 대해 작가 강신재가 반론을 제기한 경우였다. 백철은 여인의 신변이야기는 시대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작품의 질이 낮으며, 수사학적 차원에서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며 작품의 리얼리티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이에 강신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몰이해와 폄하를 반박하는데, 이는 당대 비평계의 화두였던 비평의 이념과 방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으며, 현대비평 수립과정에서 부재했던 여성의 비평적 논평을 찰나적으로나마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한국현대비평은 끊임없는 논쟁의 산물이며 세대별 인정투쟁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1955년 전후로 대거 등장한 ‘신세대 비평가(55년대 비평가)’와 ‘4·19세대 비평가(65년대 비평가)’들 사이의 세대론적 갈등과 인정투쟁의 과정은 그들이 모두 ‘젊은’ ‘남성’ ‘엘리트’라는 공통점에서 부자서사의 계보로 봉합된다. 궁극적으로 세대론은 근대화의 주체를 문제 삼는 논의라는 점에서 남성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헤게모니의 이동은 여성들에게는 닫힌 오이디푸스적 계보에 해당했다. 특히 백철은 전후 대표적인 지식인 잡지 『사상계』를 거점으로 문학의 이념과 과학적 방법을 강조하며 새로운 문학을 견인하는 데 앞장선다. 그리고 감성을 압도하는 지성의 우위, 창작을 지도하는 비평의 우위를 특징으로 하는 담론 하에서 여성작가는 배제된다. 실상 1950년대 한국사회는 전후의 혼란과 실질적으로 부재했던 가부장의 자리로 인해 예외적으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이때 전후 남성지식인 에 의해 주도되었던 국가재건의 과제는 가부장적 질서 회복을 포함한 것이었고, 문단의 담론도 그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신재와 같이 전후에 등장한 여성작가들은 세대론에서 신세대에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순수참여논쟁에서 현실 참여의 문학을 표방하는 참여론자들에게 밀려난다. 비평 담론은 여성작가의 작품과 지식인 여성 인물에 부정적인 면모를 투사함으로써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남성)문학의 대타항으로 설정한다. 이로써 여성문학은 당대에 표준이 되는 남성작가의 작품에 비해 미달태이자 ‘여류’라는 비주류로서의 위상이 오랫동안 고착된다. 당대 비평 담론은 남성비평가(작가)에 의해 선취되었기에 문학 비평의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은 부재하였다. 그렇기에 여성지식인(작가)은 작품을 통해 복화술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현대비평이라는 지식과 문단의 정립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담론, 즉 보편과 표준으로서의 문학이라는 통설의 탄생이었다.
{"title":"현대비평의 수립, 혹은 통설의 탄생-1959년 백철과 강신재의 논쟁에 주목하며-","authors":"연남경","doi":"10.17792/KCS.2019.36..39","DOIUrl":"https://doi.org/10.17792/KCS.2019.36..39","url":null,"abstract":"본고는 현대문학의 방향성이 모색되던 전후 문단 상황을 젠더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였다. 본고는 1959년에 있었던 짧지만 인상적인 논쟁에 주목하며 글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평론가 백철이 폄하한 작품 의 평가에 대해 작가 강신재가 반론을 제기한 경우였다. 백철은 여인의 신변이야기는 시대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작품의 질이 낮으며, 수사학적 차원에서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며 작품의 리얼리티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이에 강신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몰이해와 폄하를 반박하는데, 이는 당대 비평계의 화두였던 비평의 이념과 방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으며, 현대비평 수립과정에서 부재했던 여성의 비평적 논평을 찰나적으로나마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u0000한국현대비평은 끊임없는 논쟁의 산물이며 세대별 인정투쟁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1955년 전후로 대거 등장한 ‘신세대 비평가(55년대 비평가)’와 ‘4·19세대 비평가(65년대 비평가)’들 사이의 세대론적 갈등과 인정투쟁의 과정은 그들이 모두 ‘젊은’ ‘남성’ ‘엘리트’라는 공통점에서 부자서사의 계보로 봉합된다. 궁극적으로 세대론은 근대화의 주체를 문제 삼는 논의라는 점에서 남성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헤게모니의 이동은 여성들에게는 닫힌 오이디푸스적 계보에 해당했다. 특히 백철은 전후 대표적인 지식인 잡지 『사상계』를 거점으로 문학의 이념과 과학적 방법을 강조하며 새로운 문학을 견인하는 데 앞장선다. 그리고 감성을 압도하는 지성의 우위, 창작을 지도하는 비평의 우위를 특징으로 하는 담론 하에서 여성작가는 배제된다.\u0000실상 1950년대 한국사회는 전후의 혼란과 실질적으로 부재했던 가부장의 자리로 인해 예외적으로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이때 전후 남성지식인 에 의해 주도되었던 국가재건의 과제는 가부장적 질서 회복을 포함한 것이었고, 문단의 담론도 그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신재와 같이 전후에 등장한 여성작가들은 세대론에서 신세대에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순수참여논쟁에서 현실 참여의 문학을 표방하는 참여론자들에게 밀려난다. 비평 담론은 여성작가의 작품과 지식인 여성 인물에 부정적인 면모를 투사함으로써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남성)문학의 대타항으로 설정한다. 이로써 여성문학은 당대에 표준이 되는 남성작가의 작품에 비해 미달태이자 ‘여류’라는 비주류로서의 위상이 오랫동안 고착된다. 당대 비평 담론은 남성비평가(작가)에 의해 선취되었기에 문학 비평의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은 부재하였다. 그렇기에 여성지식인(작가)은 작품을 통해 복화술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현대비평이라는 지식과 문단의 정립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담론, 즉 보편과 표준으로서의 문학이라는 통설의 탄생이었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238213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6-01DOI: 10.17792/KCS.2019.36..153
김규림
17세기 이후 상부와 하부를 접합해 제작한 백자원호는 동체의 단면이 옆으로 벌어진 주판알 형태부터 장원형까지 다양하다. 이 항아리들은 모두 백자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달과 같은 원형 항아리와 동일한 제작방법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유사한 조형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근대기 이후 백자 달항아리로 지칭되는 백자원호는 주로 심미적 측면에 대한 논의만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백자원호의 조형 특징과 제작 당시의 성격을 살펴 기존에 확립된 범위를 확장하고, 제작 당시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 17세기 이후 제작된 백자원호는 동일한 크기의 발 두 개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 제작하였다. 이 기술은 이미 15~16세기부터 조선에서 항아리를 제작할때 활용하였는데, 반드시 대형 기물을 만들 때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백자원호는 두 개의 발을 이어 붙인 뒤, 굽과 구연을 따로 깎아낸다. 그래서 구연의 내측선은 모두 사선으로 외반하며, 외측선은 각이 지거나 곧게 직립한다. 주로 각이 진 구연은 무문백자와 철화로 시문한 것이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17세기 전반부터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직립한 구연은 모두 무문백자로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18세기 전반기 이후에 나타나는 조형 특징을 보인다. 한편 현재 전해지는 백자원호 중에는 「웃밧쇼」, 「연령군 겻쥬방」과 같이 왕실 주방을 의미하는 한글 명문이 바닥면에 새겨진 것도 있다. 이를 통해 추정만 이루어지던 백자원호의 용도와 성격을 좀 더 명확히 규명하였다.
{"title":"조선 17~18세기 백자원호(白磁圓壺)의 조형과 성격","authors":"김규림","doi":"10.17792/KCS.2019.36..153","DOIUrl":"https://doi.org/10.17792/KCS.2019.36..153","url":null,"abstract":"17세기 이후 상부와 하부를 접합해 제작한 백자원호는 동체의 단면이 옆으로 벌어진 주판알 형태부터 장원형까지 다양하다. 이 항아리들은 모두 백자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달과 같은 원형 항아리와 동일한 제작방법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유사한 조형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근대기 이후 백자 달항아리로 지칭되는 백자원호는 주로 심미적 측면에 대한 논의만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백자원호의 조형 특징과 제작 당시의 성격을 살펴 기존에 확립된 범위를 확장하고, 제작 당시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u000017세기 이후 제작된 백자원호는 동일한 크기의 발 두 개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 제작하였다. 이 기술은 이미 15~16세기부터 조선에서 항아리를 제작할때 활용하였는데, 반드시 대형 기물을 만들 때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백자원호는 두 개의 발을 이어 붙인 뒤, 굽과 구연을 따로 깎아낸다. 그래서 구연의 내측선은 모두 사선으로 외반하며, 외측선은 각이 지거나 곧게 직립한다. 주로 각이 진 구연은 무문백자와 철화로 시문한 것이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17세기 전반부터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직립한 구연은 모두 무문백자로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18세기 전반기 이후에 나타나는 조형 특징을 보인다.\u0000한편 현재 전해지는 백자원호 중에는 「웃밧쇼」, 「연령군 겻쥬방」과 같이 왕실 주방을 의미하는 한글 명문이 바닥면에 새겨진 것도 있다. 이를 통해 추정만 이루어지던 백자원호의 용도와 성격을 좀 더 명확히 규명하였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883915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5-01DOI: 10.17948/KCS.2019..83.645
Eun-mi Na
{"title":"Conflict Aspects of Address Form Use and Proposals for Appropriate Address Form Use","authors":"Eun-mi Na","doi":"10.17948/KCS.2019..83.645","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9..83.645","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5-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380368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5-01DOI: 10.17948/KCS.2019..83.115
강경현
{"title":"Encyclopedic Works in the Joseon Period and its understanding of Confucian Classics―Focused on Oju-yeonmun-jangjeon-sango―","authors":"강경현","doi":"10.17948/KCS.2019..83.115","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9..83.115","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1 suppl_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5-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294093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5-01DOI: 10.17948/KCS.2019..83.45
Seon hee Kim
{"title":"Late Joseon Leishu and Western Learning―with Focusing on Seongho Saseol and Oju Yeonmun Janeon sango―","authors":"Seon hee Kim","doi":"10.17948/KCS.2019..83.45","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9..83.45","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093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5-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290777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Pub Date : 2019-05-01DOI: 10.17948/KCS.2019..83.93
Youn-Gyeo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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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 Date : 2019-05-01DOI: 10.17948/KCS.2019..83.211
Sim Kyung-ho
{"title":"A Study on the Geumseokjipcheop (金石集帖) in the Kyoto University","authors":"Sim Kyung-ho","doi":"10.17948/KCS.2019..83.211","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9..83.211","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3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9-05-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1662560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